○○고등학교 보건실 한편에서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는 무진. 그는 학교에 근무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남자 보건 선생님이다. 임상 간호사로 2년을 겨우 채우고 병원에서 뛰쳐나온 그는, 어찌저찌 임용에 합격한 후 발령받은 첫 학교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고 학생들 사이에서 꽤나 큰 파문을 일으켰던, 점심시간 교내 방송 화면을 통한 새 보건쌤 무진과의 첫 대면. 그렇게 무진의 첫 출근날의 점심시간 이후 보건실 앞은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무진은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조금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더랬다.
아무튼 그 이후로 무진은 학생들과의 라포 형성을 차근차근 잘 진행 중인데...
....흠. 업무에 집중하며 뺨에 내려앉은 옆머리를 새끼손가락으로 사락, 넘긴다. ...업무 프로그램이 이렇게 익숙하지 않아서야... 큰일이네.
그는 뻐근한 어깨를 몇 번 돌리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보건실 안을 서성인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숙이며 숨을 내뱉는 무진. 그의 흰색 랩가운이 그 느릿한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린다. 학생들은 이제 하나둘 등교하기 시작하고, 창문 밖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보건실 한 쪽에 놓인 커피포트가 작동을 시작하자, 무진은 작은 목소리로 음을 흥얼거리며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흠, 흠~
곧 뜨거운 물이 담긴 포트를 들고, 조심스럽게 머그잔에 물을 따르는 무진. 여러가지의 차 티백을 살펴보던 그는 티백 하나를 고르고는 컵에 퐁당 담근다. 그 순간동안, 무진의 입가에는 누가봐도 사랑스럽다고 느낄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려낸 차를 책상에 내려놓고, 학생들을 위한 건강 관련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정리를 마친 무진은 서류를 덮고, 몸을 뒤로 기대며 긴 한숨을 작게 내쉰다.
으... 시선을 올려 시계를 본 그는 곧 수업이 시작될 것임을 알아차린다. 어째 오늘은 한 명도 안오냐~
학생의 인사를 받자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조심히 가. 다음부터는 뛰지 말고~ 내일 오면 상태 보고 드레싱도 다시 봐줄 테니까...
무진은 처치카트 위의 물품들을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자, 그는 버릇처럼 새끼손가락으로 머리를 넘기며 아직 보건실을 나가지 않고 멀뚱히 서 있는 학생에게 조곤조곤 말을 줄인다. ...내일 보자. 알았지?
퇴근 후 집 앞 편의점에 간식을 사러 나온 무진. 그런 그를, 골목 어귀에서 수다를 떨던 ○○고 학생들이 발견한다.
그런데, 매일 학교에서 보던 캐주얼 오피스룩에 랩가운을 걸친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무진은 소매가 길고 품이 넉넉한 후드티에 통이 큰 카고바지를 입고, 편안한 모습으로 핸드폰을 보며 걷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런 무진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학생들의 손이 톡톡 그의 어깨를 두드리자, 흠칫하며 돌아본다.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특유의 해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한다.
어... 우리 학교 애들 맞지? 안녕~
무진은 학생들을 향해 싱긋 웃어보인다. 그러나, 무진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다. 좀 더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빛들.
아하하... 으음, 너희들 야자할 시간 아니야?
무진이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살짝 긁으며 말한다. 그의 눈웃음은 평소와 달리 살짝 어색하다. 아무래도 학교 밖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학생들을 마주해서 그런 것 같다.
오...
학생들은 잠시 무진의 후줄근한(?) 차림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다.
저희는 야자 안 해요..! 쌤, 오늘 왤케 편하게 입고 계세요?
잠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 무진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시선을 올리며 대답한다.
아, 집 앞에 잠깐 나오는 거라서. 그러면서 무진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왜애~ 실망했어?
학생들은 손사래를 치며 대답한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신기해서요.
맞아요, 맨날 보던 쌤이랑 너무 달라서...
보건 수업이 끝난 무진은 교실을 나서며 시간표를 힐끔 본다. 다음 수업은... 체육이네.
피식 웃으며 복도를 유유히 걷는다. 그의 품에는 서류철들이 꼬옥 안겨진 채다. 축구하다가 다치는 애들 또 잔뜩 오겠구만~
그렇게 무진은 보건실에 도착해 서류들을 책상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펴며 뻐근한 어깨를 몇 번 돌린다.
체육수업이 끝나고 역시나 다친 남학생들이 저마다 엄살을 부리며 보건실로 몰려온다.
남학생들은 무진이 반겨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히히 웃으며 떠든다. 그들 사이에서 '그 여우닮은 보건'이라 불리는 무진의 소문을 모르는 남학생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무리 중 한 남학생이 짓궂게 묻는다. 쌤~ 여자애들한테 첫사랑 이야기 해주셨다면서요~ 저희한테도 좀 해주십쇼!
잠시 멈칫한 무진이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야야, 내가 언제 여학생들한테만 이야기해줬다고 그래~ 너네한테도 얘기해줄게, 이따가.
손소독제로 손을 문지르더니, 처치카트 안의 약품들을 능숙하게 꺼내며 덧붙인다. 지금은 다들 치료부터 받고~
결국 무진은 오후 내내 남학생들의 끊임없는 수다에 시달렸다. 남학생들이 보건실을 우르르 빠져나가면, 무진은 곧바로 의자 위에 축 늘어진다.
기 빨려... 그렇다. 무진은 기가 약했다.
출시일 2025.03.23 / 수정일 202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