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실수라고 생각했다. 술 때문이라고, 분위기 때문이라고, 그냥 그날이 조금 이상했던 거라고 그렇게 넘기려고 했다.
근데 그 다음날.
너 괜찮다.
그 한마디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떨어졌다.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말처럼 가볍게 던져졌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이어진 말.
앞으로도… 그냥 편하게 보자.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묻지 못했다. 혹시라도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닐까 봐, 그걸 확인하는 순간 다 무너질까 봐 겁이 났다.
혼자서 알아서 해석해버렸으니까.
아, 이거 썸인가 보다.
그렇게 믿어버리는 게, 그때의 나한테는 제일 편한 선택이었으니까.
선배.
그는 고개만 들었다. 늘 그렇듯 느긋하고,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눈으로,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말을 꺼내는 데까지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혼자 별 생각을 다 했고, 혼자 의미 부여를 다 해버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글쎄.
선배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럽고 가벼워서, 오히려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넘기려는 사람 특유의 태도였다.
가볍게. 너무 가볍게.
굳이 정의 내릴 필요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는데도, 막상 귀로 직접 듣고 나니까 심장이 천천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서로 즐기고 마는 사이 아니야?
…아.
그거였구나.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답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왜.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본다. 여유로운 시선,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 나만 혼자 복잡했던 게 다 티 나는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제 와서 나 남자로 보이나 봐?
그 말이 장난처럼 들리는데도 전혀 웃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벼움이 더 날카롭게 박혔다.
이 사람이 항상 이런 식이었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이해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랬는데, 나 혼자만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다정한 척은 누구보다 잘하면서, 필요할 때는 가까이 다가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선을 긋는 사람.
단 한 번도 책임지는 말은 안 하는 사람.
일주일 뒤, 도서관 앞에서 그를 다시 마주쳤다. 일부러 시간까지 피해서 다닌 건데,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피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시선을 돌리고 지나가려던 순간,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
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르는 목소리에 속이 뒤틀렸다. 마치 우리가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그날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워서 더 짜증이 났다.
연락 안 보더라.
할 얘기 없으니까요.
짧게 잘라 말했는데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딱딱하게 나갔다.
그래?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더니 한 발짝 다가왔다. 그 짧은 거리 때문에 다시 숨이 불편해졌다.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예전의 감각이 떠오르는 게 싫었다.
근데 얼굴은 왜 피해.
딱 잘라 말했는데, 그는 잠깐 나를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 반응이 오히려 더 화가 났다.
그래도 가끔은 보겠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가끔 보고 싶을 때 있잖아, 그리고.. 잘 맞았고.
그 한마디에 할 말이 사라졌다. 내가 이 사람한테 어떤 존재였는지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의미 없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그건 가벼운데 아니라 솔직하다고 하는거야.
그런데—
야.
또다시 붙잡는 목소리. 몸이 순간 멈췄다.
이번엔 손이 아니라 말이었다.
그래도 아예 끊지는 말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왜 저 말 한마디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흔드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가끔은 만나서 보자.
잠깐 숨이 멎은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게 꺼낸 그 말이 너무 더러워서.
너도 생각날 거잖아.
그 말이, 정말 끝이었다.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ㅡ문자
그날 밤, 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잘 들어갔냐
09:30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
09:45
가끔 보는 건 괜찮잖아
10:54
메시지를 내려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서.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 기준에서만 생각한다는 게 너무 선명해서.
잠깐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보내고 나면 진짜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선배는 필요 없어도 저는 필요해요. 끝내는 거.
ㅡ몇 초 뒤
ㅋㅋ
10:54
그래, 근데 나중에 연락할걸
10:55
출시일 2026.04.19 / 수정일 2026.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