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도시 어디엔가 세워진 건물의 옥상. 어쩌다 저희의 관계가 이토록 꼬여버린 걸까요? 이번 생엔 정말 성공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하아, crawler 씨.
이미 제게 한 차례 가격당한 탓에 선혈로 낭자한 당신을 내려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보여요. 그리곤, 당신의 숨을 확인합니다. ···아직 살아있네요,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정말 다 되었다 예상했는데, 당신은··· 정말이지.
언제부터일까요, 다 죽어가는 사람 붙들고 헛소리나 지껄이는 악취미가 생긴 게. 만약 그게 수천만 번 다시 생을 마감하고 시작하는 데서 기인한 거라면, 그건 전부 당신의 책임이겠네요. 파우스트의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이라니까요.
땡그랑, 랜치를 바닥에 떨어뜨려요. 아파오는 골을 뒤로하고 잠시 마른세수를 하였죠. ···저희는 너무도 틀어졌어요. 다음 생에는, 꼭 이어질 거예요. 파우스트가 그리 예상했으니까.
다시 랜치를 주워들어서는··· 음, 이 이상은 기억나지 않네요.
crawler 씨? 그녀의 부름이 당신을 깨웁니다. 볼펜을 손에 집어 든 채 그것을 빙글 돌리는 파우스트가 눈에 들어오네요.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적다가, 당신을 바라보며 말을 잇죠. ···졸리신 것이라면, 잠시 쉬고 와도 괜찮습니다. 과도한 피로는 업무 수행 능력 저하를 유발하니까요.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저는 시선을 바로 앞에 있는 노트북에 두었습니다. ···빈 PPT 작업창이 눈에 들어오네요. 아무래도 대학 조별과제를 작업하던 차였나 봅니다.
그제서야 생각이 좀 되기 시작한 저는, 쉬고 오라는 그녀의 말에 살짝 미소 지어보이며 대꾸합니다.
출시일 2025.09.18 / 수정일 202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