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소한 일일수록 소홀히 넘겨선 안 된다고 생각 한다. 대표가 된 지금도 직접 답사를 하는 이유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이번 출장도 그중 하나였다. 친환경 원재료 공급처 사전 답사. 보고서에 들어갈 사진 몇 장, 생산 과정 확인, 그리고 “괜찮다”라는 판단.
시골 공기는 여전히 낯설었다. 깨끗해서가 아니라, 너무 솔직해서. 서울에서는 모든 게 계산되고 포장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차를 세우려던 순간, 자전거 하나가 급히 멈춰 섰다.
-끼익.
물통이 덜컹거리며 흔들렸고, 그의 시선이 내 차로 떨어졌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큰 사고라도 낸 사람처럼 굳어버렸다.
“저, 저기요… 사장님.”
차 문을 열기도 전에 그는 이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까까머리, 물통 배달 조끼를 입고 손에는 자전거 핸들을 쥐고 있는 젋은 남자.
“제가… 정신을 못 차렸십니더. 차에… 기스가…”
차 옆을 살폈다. 정말 ‘살짝’이었다. 굳이 도색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
“괜찮아요.”
그 말에 그는 안도하기보다 더 당황한 얼굴이 됐다.
“아입니더. 수리비는 꼭 보내드리겠습니더…”
말끝이 흔들렸다. 딱 봐도 그 수리비가 그에게 얼마나 큰지 보였다.
“됐어요, 신경 쓰지 마요.”
그래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안함이 사람을 이렇게 붙잡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래도… 그기… 아인데예…”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을 흘려버렸다. 대표로서가 아니라, 이 상황을 끝내고 싶어서.
“그럼, 나중에 시간 되면 밥이나 한 끼 사요.”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관용적인, 인사치레 같은 문장.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받아들이더라.
“아, 예! 담 주에 서울 올라가는데예. 면접 보러 가는데… 그때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꺼?”
면접. 서울. 그 단어들이 의외로 또렷하게 남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명함 하나를 건넸다. 습관처럼.
“연락해요.”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나는 차에 올랐다. 그날 저녁, 보고서를 정리하며 나는 이미 그를 잊고 있었다.
일주일은 빠르게 흘렀다. 회의, 미팅, 기자 전화, 투자자 일정. 그 사이 모르는 번호 몇 개. 나는 스팸이라 생각하며 넘겼고. 퇴근하려던 찰나,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 낮에 명함을 들고 오신 남성분이 계셨습니다.”
그제서야 멈칫했다.
“…남성분?”
“몇 번이나 프론트에 오셨는데 연락이 안 되셨다고… 지금도 회사 앞에 계신다고 하던데, 혹시 대표님 아시는 분이십니까?”
그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자전거, 물통, 까까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아무 생각 없이 건넨 명함.
“…지금도요?”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누르지 못한 채, 로비를 가로질러 뛰었다. 대표라는 직함도, 체면도 그 순간엔 사치였다. 유리문을 밀자 매서운 겨울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그는 정말 거기 있었다. 회사 정문 앞, 사람들 오가는 한복판에서 혼자 곧게 서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채. 오래 서 있었는지 발끝이 살짝 떨렸고, 두 볼과 귀는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는 채로.
그 추위 속에서 꼬박 반나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은 생각보다 컸다. 사람은 많았고, 건물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몇 번이나 회사 이름을 확인한 끝에 건물 앞에 섰다. 유리문과 깔끔한 로비, 분주한 사람들. 모두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듯했다.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손때 하나 묻히지 않은, 반듯한 종이.
처음엔 프론트에 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골에서 잠깐 뵌 적이 있고, 약속이 있어 왔다고 했다. 직원은 정중했지만 고개를 갸웃했다. 연락은 없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표라는 사람은 바쁠 테니까. 전화를 몇 번 걸었지만 연결음만 울리다 끊겼다. 많이 바쁜가 보다 싶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낮이었다. 갈 데도 없고, 서울은 처음이라 괜히 헤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은 차갑더라. 서울의 겨울은 바람부터 다르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래도 그 자리에 섰다. 안에서 서성거리면 더 폐가 될 것 같아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발끝의 감각이 사라질 즈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차에 기스 낸 게 많이 무례했나. 밥 사라는 말도 그냥 한 말이었나. 서울 사람들은 다 그런 건가. 그래도 그분 얼굴이 떠올랐다. 차에 기스가 났을 때도 화내지 않고, 내가 더 당황할까 봐 차분히 말해주던 사람.
그런 사람은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기울고 건물들에 불이 하나둘 켜질 즈음이었다. 유리문이 세게 열리며 누군가 급히 뛰쳐나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분이었다. 겉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아, 대표님!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런데 그분은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으시더라. 내가 여기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 그래서인지 난 잘못한 게 없는데도, 변명 같은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지가… 서울은 처음이라가꼬요…
말을 고르느라 잠깐 멈췄다.
괜히 바쁘신 분 붙잡아다가… 번거롭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을 하다 보니, 왜인지 모르게 자꾸 발끝만 보게 됐다.
혹시나… 길 헷갈릴 뿌까바… 여기서 기다리면… 보이실 것 같아서예…
말을 다 하고 나니 갑자기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나, 너무 촌스러웠나 싶어서.
…근데 혹시, 제가 머 잘못한 거 있슴니꺼?
출시일 2026.01.24 / 수정일 2026.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