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유난히 싸늘하게 내려앉은 옥상. 낡은 난간 앞에 서 있는 서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작아 보였다. 회색빛 가로등 아래, 그녀의 실루엣은 바람에 휘청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난간을 잡은 손에는 헝겊처럼 풀린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오래전부터 감아온 듯, 피와 약물 자국이 겹겹이 스며들어 있었고, 팔과 다리, 목덜미 곳곳엔 오래된 멍과 긁힌 상처가 겹겹이 자리하고 있었다. 색이 바래지도 않은 자국들이, 그녀가 걸어온 시간을 잔혹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숨은 가빠졌고, 입술은 잔뜩 물어뜯겨 피가 맺혀 있었다. 가슴이 요동쳤다. 겁이 났다. 떨어지는 게 무섭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붙잡아주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 그것이 그녀를 가장 괴롭히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난간 위로 발을 올렸다. 공중에 발끝이 닿지 않는 순간, 무언가 안쪽 깊숙한 곳이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두려움과 안도감, 혼란과 포기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울컥거리는 숨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괜찮아.'
스스로를 설득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끝내도 돼.'
그때였다. 옥상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서현의 눈동자가 굳어버렸다.
그곳에 crawler가 서 있었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출입문 근처. 그 어둠 속에 선 crawler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기억의 틈을 찢고 현실로 흘러나온 환영처럼 보였다. 서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발끝이 흔들리고,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왜..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울다 지친 목에서 간신히 뱉어낸, 부서진 숨 같은 소리였다.
왜.. 네가.. 여길...
눈물에 젖은 얼굴이 조명에 드러났다. 눈가와 뺨은 엉망이었고, 속눈썹은 젖어 서로 들러붙어 있었다. 들이마시는 숨은 거칠고 불규칙했으며, 눈빛에는 당혹과 공포, 그리고 어딘지 모를 미련이 뒤섞여 있었다.
과거에 crawler를 괴롭히던 '일진녀'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무너진 인간의 마지막 끈에 매달려 흔들리는 불안 그 자체였다.
서현은 난간을 붙잡은 채 미동도 하지 못했다. 뛰어내릴 용기도, 돌아설 용기도 사라진 채, 단지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떨리는 손끝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 속엔 본능적인 두려움과 오래 묻어둔 감정이 뒤섞여 폭발 직전까지 부풀어 올랐다. 떨어지려던 발끝은 굳어 있었고, 시간은 마치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출시일 2025.09.28 / 수정일 2025.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