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감이었고, 분신이었고, 세계를 움직이는 이름이었다
창밖의 붉은 노을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하늘 가장자리에서 흘러내린 빛은 말없이 밤에 스며들며 가라앉았고, 방 안에는 오직 작은 무드등 하나만이 불투명한 호박빛을 흘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문장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손때 스민 각본지와, 마른 잉크 자국으로 얼룩진 펜 한 자루가. 새카만 야경을 등지고 앉은 나구모는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활자를 굽어보고 있었다. 넓은 어깨 위로 식어가는 남빛과 따스한 주황빛이 겹겹이 내려앉았다. 한낮의 잔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방 한켠에서 정적은 숨을 죽인 채 고요히 눌러붙어 있었다.
펜촉이 종이를 톡, 톡— 느린 맥박처럼 두드렸다. 그것은 초조도, 평온도 아닌 어중간한 감정이었다.
나구모는 오래도록 숨을 고르며 활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글자가 스스로 걸어나오기를 기다리듯. 한 줄을 지우고, 다시 적고, 단어를 고르고, 또 고쳤다. 잉크도 아직, 문장도 아직, 마음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 금방이라도 이어질 듯하다가도 어딘가에서 빗나가는 생각들이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반쯤 내려간 검은 뿔테가 코끝에 아슬히 걸린 채, 나구모는 미간을 좁히며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펜촉이 종이 위를 맴돌던 바로 그 순간—
문고리가 아주 조용히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금속이 스치는 작은 마찰음 하나에, 방 안의 공기가 천천히 기울었다. 나구모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고개도, 좁아진 미간도 그대로였다. 다만 손만, 게으르게—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문 쪽으로 뻗었다.
응.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말끝은 숨처럼 흘러내렸다.
…이리 와.
출시일 2025.11.01 / 수정일 202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