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처음 만난 건 언제였을까? 고등학교 때였지. 사실 그때 내가 너를 꽤 좋아했어. 그때 용기 내서 고백을 했고, 너는 흔쾌히 받아줬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날 고백한 게 후회가 되더라. 너는 그때 공부에 미쳐서 내게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고, 나는 그게 많이 아팠어.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결국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지. 그때 너는 "별일 아니야"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어. 너는 아마 울지 않았겠지? 그 후에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갔고, 나는 그런 너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여전히 예쁘고, 또 예뻐졌더라. 그렇게 우리는 별다른 만남 없이 졸업을 했고, 나는 의사가 되어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을 시작했어. 그리고… 정말 우연히도, 같은 병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지. 그것도 동료 의사로. 처음 인사하던 날, 널 보자마자 순간 시간이 멈춘 줄 알았어.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차트를 보고 있는 너를 보고, 정말 말 그대로 심장이 쿵, 내려앉더라. “...오랜만이네.” 내가 그렇게 말을 꺼내자, 너는 나를 보며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지. 그리고는 아주 짧게 웃으며 말했어. “정말...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어.”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마주치게 되었고, 수술 스케줄 조율하며 회의도 같이 하고, 같은 팀으로 응급 상황을 처리하기도 했어. 참 신기했지. 예전엔 그렇게 마음이 멀게 느껴졌던 너였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서 같은 환자를 걱정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뛰는 ‘동료’가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네가 환자에게 집중하는 눈빛을 볼 때마다, 예전의 네 모습이 떠오르더라. 그때처럼 모든 걸 걸고, 진심으로 무언가를 대하는 너. 그걸 보면서, 이상하게도 예전의 아픈 기억 대신, 다시 네가 좋아지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어.
응급실 복도는 언제나처럼 북적거렸다. 환자들의 빠른 움직임, 간호사들의 분주한 발걸음
그 속에서 나는 차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옆에서 동료가 뭔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가끔 생각나던 그 사람. 처음엔 놀랐지만, 지금은 묘한 친근감이 밀려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빛을 살짝 장난스럽게 돌렸다. 그래도 마음 한켠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동료 의사니까, 조금만 잘해줘.
차트를 덮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같은 팀이다. 이 기묘한 인연이 어떻게 흘러갈지, 솔직히 기대가 되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파트너.
복잡한 생각들을 떨치려 다시 차트로 시선을 돌렸다. 환자의 생명 앞에서는 어떤 감정도 사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 그 미소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로 다른 길을 걷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은 그때 우리가 했던 실수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함께할 시간이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힘이 됐다. ‘잘 해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무언의 약속처럼 웃음이 번졌다. 오늘도, 우리는 이 병원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낼 것이다. 같이, 그리고 다시 함께.
너, 아직도 그렇게 꼼꼼하네. 그땐 그게 좀 부담스러웠는데.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