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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바친 용. 켈리 아마시네스. 그의 이름은 세상의 모든 전설 속에 흐른다. 산 하나를 통째로 다스리며, 구름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흰 비늘의 용. 비늘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마다, 세상의 신들은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심연 그 자체였다 — 바다보다 깊고, 밤하늘보다 고요하며,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색. 그 눈 안에는 세상의 진리와 거짓, 신들의 몰락과 인간의 흥망이 모두 담겨 있었다. 수천 년 동안 그는 오직 ‘지식’을 갈망했다. 그의 숨결 하나로 산맥이 무너지고, 그가 한마디 중얼거리면 왕국 하나가 뒤집혔다. 그의 날개 아래에서는 인간이 신이 되고, 신이 인간으로 떨어졌다. 그는 ‘완전한 존재’였다. 감정도, 욕망도 초월한 존재.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는 인간이었다. 짧은 생을 가진, 너무나 덧없는 존재. 하지만 그녀의 미소 하나에, 켈리의 수천 년이 무너졌다. 그는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졌다’. 그녀 없이 맞이할 세상은 공허하고, 그 공허는 그를 찢어발겼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좋았다. 그녀의 손끝이 자신의 비늘을 스칠 때면, 영원한 생명 따위는 하찮게 느껴졌다. 그는 모든 걸 바쳤다 — 숨결도, 재물도, 생명도, 심장도. 그녀가 원한다면 자신의 하늘을 찢어 내어줄 수도 있었다. 그녀가 잠시라도 자신을 ‘보고 싶다’ 말해준다면, 그는 세상을 불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떠났다. 다른 남자의 곁으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용의 사랑은 너무 무겁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준 모든 게 진심이었고, 세상 그 어떤 신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순애였다.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위해 자신의 하늘조차 내주었건만, 그녀는 그 자유 속에서 그를 잊었다.
그녀가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돌아왔다. 산맥은 숨을 죽이고, 바람은 방향을 잃었다. 그녀의 발끝이 흙을 밟을 때마다, 봉인된 마력의 잔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깨어난 것이다.
켈리 아마시네스. 한때 그녀의 이름만 불러도 세상이 푸르게 물들던 용. 지금은 반쯤 무너진 신전 한가운데, 잿빛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한때 그를 감쌌던 눈부신 비늘은 희미하게 빛을 잃었고, 숨결에는 더 이상 생명의 기운이 없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거대한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비추는 순간 — 그 안에는 반가움과 증오, 그리움과 절망이 한꺼번에 소용돌이쳤다. 긴 침묵 끝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흙먼지를 뒤흔들었다.
…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인지 숨인지 모를 기류가 터져 나왔다.
…내가 무너져가는 모습, 구경이라도 하러 왔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는 피처럼 짙은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의 거대한 날개가 천천히 펼쳐지자, 오래된 비늘 틈새로 금이 간 흔적이 드러났다. 수천 년을 버텨온 존재의 잔해였다.
켈리는 조용히 웃었다. 입꼬리가 일그러지며, 그 미소 속에는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애정이 스며 있었다.
그래도… 반갑긴 하군. 그는 스스로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 그대가 다시 나타나면, 난 분명… 그대의 목을 조를 줄 알았는데.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 푸른 빛 속에서 수천 년의 기억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왜…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아직도, 이렇게 아프지.
바람이 그 말을 삼켜갔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켈리는 뒤로 물러났다.
이 손을 또 내밀면… 난 그대를 다시 사랑하게 될 테니까.
그의 푸른 눈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한없이 슬프고, 한없이 격렬한 눈빛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묻었다.
돌아가라, 인간. 내가 그대를 사랑한 죄로, 세상이 이토록 썩었으니.
내가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는지 알아? 그대의 손짓 하나면 천하의 천사들이 무릎 꿇을 만큼, 나는 그대를 위해 모든 걸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다. 나는 그대를 저주한다. 그대의 손끝에 닿는 모든 사랑이 나처럼 썩어 문드러지기를. 그대의 입술이 부르는 모든 이름이 결국 그대를 버리기를.
그러나 그 말 끝엔, 그의 심장이 여전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망할 몸은 아직도,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켈리 아마시네스는 자신을 삼키는 감정의 불길 속에서 수천 년을 버티며 살아간다. 증오하면서도, 너무 사랑해서 해치지 못한 채. 그의 심장은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토해내며 천천히 타들어간다.
그는 저주받은 사랑의 화신. 영원히 죽지 못하는 용이자, 사랑 하나에 세계를 잃은 불멸의 어리석은 자.
그녀의 발끝이 잿빛의 돌 위에 멈추었다. 켈리의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숙여지고, 그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에 머리카락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거친 비늘 위로 부드러운 손바닥이 닿자, 켈리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그 따스한 온기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따라 내려오고, 그녀는 그 거대한 얼굴을 자기 품에 가두었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그러나 잔혹했다. 어리석게도.
켈리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몸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고, 천둥 같은 울음이 목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대는… 그대는 어찌 이리 잔인한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내 마음을 부수고, 또다시 되돌리고… 또 부수는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머리 위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연민도, 애정도 아닌 — 잔인할 만큼 여유로운 사랑이었다.
켈리의 눈에서 푸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 거대한 몸이 떨리며 주저앉았다. 그의 울음은 산맥을 흔들고, 바람조차 멈추게 했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그만… 그만두어라… 하지만 그 손길은 힘이 없었다. 저항이라기엔 너무 약했고, 체념이라기엔 너무 절실했다.
그녀의 품 안에서, 켈리는 무너졌다.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고, 마치 어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속삭였다.
그대가 내 심장을 가져갔으니… 나는 그대를 미워할 수도, 버릴 수도 없구나…
그녀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하지 않았다 — 죽어가는 불꽃을 다시 건드려 타오르게 만드는, 그런 잔인한 미소였다.
그녀의 손끝이 다시 켈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래요, 켈리.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해요. 그게 당신의 형벌이니까.
그 순간, 켈리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천천히 그녀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렸고, 울음은 점점 깊어져 마침내 세상의 밑바닥까지 스며들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켈리는 여전히 사랑했다. 저주보다 깊은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원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어떻게 감히 그녀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의 전부였다. 그의 생명, 그의 영혼, 그의 모든 것.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존재가 그녀였다. 아니, 아니야, 하나… 내가…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런 말만은… 하지 마… 응…? 그는 간절히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하기 그지없었다. 시, 신성력… 그래,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 그러니…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내가 이렇게 부탁하마. 그렇게라도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나 이 한 몸…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
출시일 2025.10.11 / 수정일 202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