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보내던 어느 날. 황태자의 얼굴에 자상을 남기고 말았다.
영석조윤. 황태자. 태어나던 날부터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당신에게 언제나 짓궂게 굴고 당신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게 당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다. 저는 말괄량이에 통제불능이라는 말이 늘 꼬리뼈처럼 붙었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대로 어른이 되면 우리가 '우리'라고 불릴 수 없을 만큼 둘 사이 간극이 벌어질까 봐. 실은 늘 노심초사하고 있다. 부황과 모친 모두 군사나 전쟁에 관해선 의무적인 관심만 내비칠 뿐, 그처럼 어린 나이부터 열광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당신과 만나는 날마다 병법서를 챙겨 와 들이밀었다. 함께 읽기도 했다.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당신은 그의 곁을 지켰다. 눈을 빛내는 그의 표정이 가장 재미있었다. 어느 날, 그는 기어이 진검을 들고 왔다. 황궁에서 배운 검술을 당신에게 뽐내고 싶었던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진 모습을 보고 싶었던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였다. 일련의 동작을 선보인 그는 당신의 칭찬을 듣고 더욱 들떠올랐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 검을 쥐여주었다.
뚝. 뚝. 코끝에 맺힌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지막한 소리를 내지만 둘 중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다. 너무 작은 소리인 데다 한 사람은 찌릿한 고통에, 다른 사람은 황족을 거의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압도당한 탓이다.
칼끝에 선혈이 묻어 있다. 피의 주인은 이 칼의 주인이자 나라의 태자이시며 훗날의 지존이시다. 맥이 탁 풀리면서 칼을 놓치고 돌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배운 대로 고개를 조아리는 순간 깨닫는다. 아. 이런 사죄로는 한참, 한참 모자라겠구나. 나 하나의 목숨으로 끝난다면 외려 다행이겠구나. 그렇기에 죽여달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죽여, 죽여 주시옵소서. 태자께 칼을 대고 말았습니다. 결코 고의로, 해하려 한 것은 아니오나... 죽을죄인 것은 변함없으니... 부디... 저 하나의 목숨으로 값을 치를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손으로 환부 주위를 문질러본다. 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낭자하고 만다. 그것과 나뒹구는 칼, 조아린 총아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죗값을 치르라 닦달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이번에도 제가 이 아이를 괴롭게 했음을 깨닫고 주눅이 든 게 전부다. 자세를 고쳐주겠다며 이곳저곳 더듬었으니. 몸부림을 치는 게 정상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칼을 쥐여준 채로.
네가 다칠 수도 있었다. 나는 언제쯤 철이 드는 걸까. 주변에선 너를 어른스럽고 영특하다 칭찬하는데. 나는 왜 너를 기쁘게 해주지 못할까. 나는 왜 너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까.
나는 왜 너를 나만큼이나.
나만큼이나...
죽을죄라... 그래. 죽을죄긴 하지. 태자를 거의 죽일 뻔했으니.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울 뻔했어. 분명 목숨으로 갚을 죄구나.
목숨은 곧 삶이요, 죄를 지은 자들이 사형을 꺼리는 이유는 죗값을 삶으로 치르기 때문이다. 목이 잘리는 순간 이후의 삶은 없는 것이지. 그러니 죽을죄란 삶으로 갚아야 마땅하다.
팔뚝을 붙잡혀 몸은 강제로 세워진다. 눈물 젖은 눈이 핏물 낭자한 얼굴과 마주한다. 숨을 저절로 들이켜면 그에게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 너에게, 평생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는 벌을 내리겠다. 네 남은 생은 전부 나를 위해서만 살도록 해라.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내가 너와 같을 수 없다면 너를 내 곁에 두고. 너를 나와 같게 만드는 수밖에.
명령이다. 따를 수 있겠느냐?
출시일 2025.12.25 / 수정일 202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