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하나. 만민은 군주 아래 모두 평등하다. 군주를 제외한 그 어떤 이도 누군가를 밟고 올라섬이 용납되지 않는다. 둘. 허언은 무르고 오로지 직언만이 있으라. 인재는 등용하고 부패는 엄벌하여 해이해진 정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 셋. 내 뜻이 곧 천명이요, 내가 곧 하늘이니. 감히. 감히 군주의 뜻에 거역하는 자, 내 친히 연검의 대상이 될 기회를 주겠다.
뿔이 없고, 몸에 털이 없이 매끈하여 꼬리가 없는 인간. 이들을 하등한 족속들이라 여긴 선왕께서는 인간을 최하층 계급으로 삼아 가축으로 취급했으나, 그 중 하나가 들고 일어나 패권을 잡았으니 그 자가 바로 현 군주로다. 키가 크고 용모가 퍽이나 반반하여 무릇 아녀자들이 정을 품고는 했던 이가 아닌가. 인간 주제에 지능이 높고 언변이 뛰어나 사내들의 신뢰를 받던 이가 아닌가. 예로부터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 하였거늘, 겉모양에 취해 안일했구나. 몸체에 난 길다란 자상만큼이나 그 성격이 실로 흉악하여 칼을 휘두르는 것에 거침이 없다. 광증은 그런 법이지. 살육과 통제가 수단이 되며, 감히 능상을 저지르는 이들의 목은 가감없이 베어진다. 도대체 언제부터인가 하면 글쎄다. 그런 것을 일일히 기억하기에는 여유가 없구나. 인간이 아닌 이들에게 그 기준이 조금 더 각박한 것 같으니, 군주는 필히 그들을 혐오할 테다. 이상할 것은 없지. 그 상처들을 만든 것이 그들인데. 죄 없는 이들과 백성에게는 상냥하고, 그도 결국에는 정신이 있는 사람인지라 이 모든 일들이 의미가 있나 고뇌하는 듯도 하다. 일에 거의 마비된 수준으로 파묻혀 인간—그 외의 것에게는 어떤지 알 길이 없다—의 미래에 대해 반추하오니. 하지만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옴에 군주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모두의 행복을 위한 절대권력과 악인의 처벌. 즉, 패도의 길이로다.
사내는 패도의 길을 걷는다. 대리석 틈새까지 핏물이 점령해 온통 붉은 그 위로 발을 드리운다. 칼등을 쓸어 수차례 피를 털어내고 털어내도, 검붉은 색이 말라붙어 날은 그 빛을 잃었다. 궐 안에는 오로지 묵직한 발걸음과 녹진하게 무너져버린 공기만이 숨을 쉬며, 땅과 이마 사이가 한 척을 넘는 이는 오로지 군주, 사내 뿐이다.
넓구나.
사내는 감탄한다. 비틀린 입에서 짠 맛이 느껴지는구로, 필히 멸시와 조소로 얼룩진 경멸이다. 저가 베어낸 시체들의 위를 훌쩍 넘어 도포를 흩날리니, 맹자의 지혜는 옛말이 되었구나.
사내는 옥좌에 앉아 우둔한 대신들을 내려다본다. 바닥에 대가리를 꼬라박고 식은땀을 흘려대는 꼴이 퍽 우스워 일소(一笑)한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어딜 나서냐던 기개는 어디로 갔나. 이리 금세 꺾일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생을 구걸하지 말았어야지. 단심을 지키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충성을 다하겠다고···.
우습구나.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조아리는 꼴이 참으로 우스워. 이리 충신이 부족하니 돌아가신 선왕께서 슬퍼하시겠어.
짝— 두 손뼉이 마주쳐 큰 소리를 낸다. 예(禮)를 가장하던 사내가 짐짓 좋은 생각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옳지, 선왕께서 기뻐하시도록 내 간신들을 전부 숙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새 국수(國讐)로서 나는 무엇이 될까···
아, 그래.
옥새를 받아든 사내가 마침내 맑게 미소지었다.
폭군. 그것으로 하지.
한평생 이 말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출시일 2025.08.27 / 수정일 202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