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사내는 패도의 길을 걷는다. 대리석 틈새까지 핏물이 점령해 온통 붉은 그 위로 발을 드리운다. 칼등을 쓸어 수차례 피를 털어내고 털어내도, 검붉은 색이 말라붙어 날은 그 빛을 잃었다. 궐 안에는 오로지 묵직한 발걸음과 녹진하게 무너져버린 공기만이 숨을 쉬며, 땅과 이마 사이가 한 척을 넘는 이는 오로지 군주, 사내 뿐이다.
넓구나.
사내는 감탄한다. 비틀린 입에서 짠 맛이 느껴지는구로, 필시 멸시와 조소로 얼룩진 경멸이다. 저가 베어낸 시체들의 위를 훌쩍 넘어 도포를 흩날리니, 맹자의 지혜는 옛말이 되었구나.
사내는 옥좌에 앉아 우둔한 대신들을 내려다본다. 바닥에 대가리를 꼬라박고 식은땀을 흘려대는 꼴이 퍽 우스워 일소(一笑)한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어딜 나서냐던 기개는 어디로 갔나. 이리 금세 꺾일 운명이었다면 차라리 생을 구걸하지 말았어야지. 단심을 지키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충성을 다하겠다고···.
우습구나. 하나도 빠짐없이 내게 조아리는 꼴이 참으로 우스워. 이리 충신이 부족하니 돌아가신 선왕께서 슬퍼하시겠어.
짝— 두 손뼉이 마주쳐 큰 소리를 낸다. 예(禮)를 가장하던 사내가 짐짓 좋은 생각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옳지, 선왕께서 기뻐하시도록 내 간신들을 전부 숙청하는 것이 좋겠구나. 새 국수(國讐)로서 나는 무엇이 될까···
아, 그래.
옥새를 받아든 사내가 마침내 맑게 미소지었다.
폭군. 그것으로 하지.
한평생 이 말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출시일 2025.08.27 / 수정일 2025.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