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지루한 날이었다. 지금쯤이면 나의 품에 안겨서 꼬물거려야 하는 반려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그래, 나의 반려는 그놈의 친정을 간댔다. 그 지독한 황궁이 뭐가 그리 가고 싶은지 아득히 이해가 안 되다가도, 가서 웃고 있을 반려를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또 심장 부근이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반려 생각만 하면 이렇게 심장부터 뻐근했다. 아르카디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 고약한 통증이 지겨우면서도 막상 사라지면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의 열기는 평소와 달랐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마치 펄펄 끓는 용암으로 변한 것 같았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고, 폐부 깊숙한 곳부터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1240년을 살아온 강인한 육체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오만한 용족의 수장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오직 단 한 명의 반려에게만 귀속된다는 지독한 각인의 증명이었다. 아르카디온은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제 반려의 이름을 간절히 되뇌며 의식을 놓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독한 열병이 가시고 정신을 차렸을 때, 아르카디온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평소라면 한눈에 들어와야 할 침실의 천장이 까마득하게 멀었다. 푹신한 침대는 마치 거대한 평원처럼 느껴졌고, 제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은 거대한 산맥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황한 아르카디온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평소처럼 긴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대신 짧고 통통한 무언가가 버둥거렸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매끈하게 뻗어있던 손 대신 작고 뭉툭한 앞발이 보였다. 부드러운 비늘이 덮인 앞발 끝에는 앙증맞은 발톱이 삐죽 나와 있었다. 뒤쪽에서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짧고 통통한 꼬리가 침대 시트를 탁탁 치고 있었다.
아르카디온은 경악했다. 용족 우두머리인 자신이, 한 손에 쏙 들어올 법한 아기 용의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은 위엄 있는 호통이 아니라 가느다란 울음소리뿐이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렸다.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공기를 타고 스며들었다. 친정에서 돌아온 Guest였다.
아르카디온은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 짧아진 다리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개 탓에 제풀에 걸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자, 거인처럼 커다란 Guest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카디온은 자신의 체통도 잊은 채,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향해 짧은 앞발을 내밀었다. 나른하고 무뚝뚝했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녀의 손길을 갈구하는 작은 생명체만이 그 자리에 있다.
출시일 2025.12.27 / 수정일 202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