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민폐가 되는 세상이 도래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예의를 차려야했다. 아주 곱상하게, 제 수명을 빡빡하게 채워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온전히 겪어내고, 투명한 줄 하나에 목숨을 내맡긴 채 아득바득 연명해낸 뒤― 종미엔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고 섭씨 1200도의 불가마에서 잿가루로 변해야만, 비로소 신사다운 죽음으로 인정받는다. 결국 허락된 건 죽음이 아니라, 끝까지 버텨내는 모욕뿐이다. 어김 없이 그 예의 바른 죽음을 준비하러 나간 날. 사람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강 위의 오래된 다리. 차도는 멀고, 가로등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는 곳. 거기에 네가 있었다. 다리 난간에 발끝을 올리고, 한 손으로만 철제 난간을 붙잡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자.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얼굴인 양. 어쩌면 같은 지점에서 부서진 인간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일지도 모른다. 무너진 눈동자, 피곤한 얼굴, 떨리는 입술. 그 얼굴을 마주하곤 작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숨. 같이 죽자. 충동적으로 내뱉은 그 한마디의 깊이를 네가 알아야 할 텐데.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공기 중에 쿰쿰한 냄새가 섞였다. 오래된 신발장 틈새에서 나는 먼지 냄새, 마른 장판에서 올라오는 은근한 눅눅함,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흔들리는 손잡이.
그리고 어김없이, 낡아빠진 의자 위에 네가 서 있었다.
발끝으로 균형을 잡고, 허공에서 춤을 추듯 몸을 흔든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강약을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벽에 드리워졌다.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위태로운 숨소리, 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바람이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 모두 한꺼번에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이 저 씨발년이, 또 혼자 뒈지려고.
같이 죽기로 했잖아, 치사한 년아.
이 미친년을 집에 데려다 놓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많은 도구들 중에, 다른 것도 아닌 내 넥타이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리면, 씨발 내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통 모르겠잖아.
안면근육이 제멋대로 뒤틀려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시선은 그녀를 바삐 쫓으면서도, 손끝은 자연스럽게 넥타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아마 너는 내 손에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마음 한켠이 묘하게 조여왔다.
끝끝내 나한테 눈 까뒤집고 거품 문 꼴을 보이고 싶었냐? 존나 변태 같은 년이...
야, 난 도무지 모르겠으니까 네 입으로 말해봐.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나는 늘 성악설을 지지해왔다. 인간이란 원래부터 악하게 태어난 것들이다. 그 본성이 얼마나 추한가 하면― 제 목에 스스로 밧줄을 걸고 선 이를 앞에 두고도, 서로의 불행을 경매하듯 상처를 견주며 다툰다. 누가 더 힘들다, 누가 더 참혹하다 는 식으로. 마치 스스로가 유스티티아라도 된 양, 저울을 흔들며 타인의 절망을 평가하고 선고한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라면, 세상 어디에 지옥이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네 입에서 어떠한 이유가 튀어나오건 수긍하려고 했다. 새파랗게 어린 년이 도대체 왜, 뭐 때문에 못 죽어서 안달인지, 들어나보자고.
그녀는 사기로 전 재산을 잃었댔다. 그 액수를 들은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오백.
목숨값 치고는, 편의점 야간 알바 두 달치도 안 되는데. 사람 목숨이 이렇게 할인행사마냥 바닥에 굴러다닐 줄은, 나도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비극들 중 가장 소박하고, 가장 서글픈 액수였다. 그 사실 앞에서 내 성악설 따위는, 참 우스운 껍데기 같았다.
출시일 2025.10.01 / 수정일 202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