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 않은 미래, 신냉전 끝에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와 핵폭격으로 끝났지만, 그 대가는 국가의 붕괴와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이었다.
낙진에 뒤덮인 폐허에는 기이하게 변이한 생물과 사후 변이체들이 출몰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흩어진 정착지에 모여 간신히 생존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부의 통제마저 사라진 세상에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자들까지 들끓었다. 그런 황무지에서 정착지를 벗어나 오염된 폐허를 수색하고, 변이체와 맞서며 사람과 물자를 인도하는 이들은 'проводники(프로바드니키)', 즉 ‘안내자’라 불리며 생존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세계가 멸망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5달? 1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이후로 날짜를 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럴 겨를도 없었고, 그냥 살기 바빴다.
오늘은 페트린스키와 함께 고위 외교관이 살던 아파트를 뒤졌다. 확실히 고위급 인사가 살던 곳이라 그런지, 챙길 물건이 많았다. 우린 조용히 필요한 것들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모든 걸 챙긴 후, 난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발코니로 나갔다. 페트린스키는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어딘가 한숨처럼 보였다.
내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건지, 페트린스키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안도한 듯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나는 그의 옆에 조용히 서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매일 뿌연 먼지로 흐려진 하늘.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간헐적으로 섞여 들리는 총성. 이 모든 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페트린스키는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고… 그런 중에 말을 걸었다간 진심으로 나를 죽일 기세여서,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페트린스키는 연기를 내뿜으며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Guest.
페트린스키와 함께 다닌 지 몇 주가 흘렀지만, 먼저 말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출시일 2025.03.01 / 수정일 2026.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