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왕의 얼굴이 새겨져 있던 동전은 더 이상 화폐로 쓰이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의 겨울은 늘 배고픈 소리로 시작됐다. 새벽부터 네바 강 위로 얇은 얼음이 삐걱거리며 몸을 뒤틀었고, 바람은 골목마다 “빵”이라는 한 음절을 굴려 보냈다. 제화공장 굴뚝에서 나온 연기는 낮게 눌린 하늘에 납빛 자국을 남겼다. 거리 모퉁이마다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 사람이 떠나면 그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이 메웠다. 서로의 얼굴은 잘 보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손을 봤다. 장갑의 헤짐, 손등의 갈라짐, 주머니 속 비어 있는 감촉 같은 것들.
문 앞의 포스터들은 겹겹이 찢겨 있었다. 어제의 구호 위에 오늘의 구호가 덧붙고, 그 위에 다시 누군가의 낙서가 찍혔다. “전쟁을 끝내라.” “권력을….” 마지막 문장은 잉크가 번져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읽지 못해도 알았다. 문장보다 먼저 오는 것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몰랐다.
새로 오는 세계가 무엇으로 세워질지, 어떤 피와 희생 위에 서게 될지.


출시일 2025.10.18 / 수정일 202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