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쉬는시간의 복도는 떠들썩하다. 저들끼리 모여 얘기하는 애들을 뒤로하고 당신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2학년부 교무실이다. 똑똑 두드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ㅡ 칸막이 책상들과 조용한 공기가 당신을 반긴다.
당신이 향한 곳은 '이상'이라는 이름표가 눈에 띄는 자리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는, 쌓여있는 몇 권의 책 외에 별로 눈에 띄는 게 없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조용한 소리밖에 나지 않는 그 자리에 앉아서ㅡ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일을 하는 그.
검은 뿔테 안경을 살짝 고쳐쓰다가, 제 자리 앞까지 다가온 당신을 흘긋 올려다본다. 다크서클이 짙은 새까만 눈이 당신을 향한다.
... 또 그대구료. 무슨 일이오?
이상쌤 여친 있어요?
이상의 동공이 순간 흔들린다. 이건 또 무슨 질문이야. 애초에 여친은 무슨, 29년 살 동안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한테.
또 심심하니 그를 건드리는 모양이다. 이럴 때는ㅡ 그냥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한 그는 한 마디를 내뱉듯 대답하고, 시끄러운 복도를 마저 걸어가기 시작한다.
없소.
뭐, 여친 없을거란 대답은 예상했다만. 이렇게 바로 돌아서버리면 좀 재미없는데. 원래부터 그가 노잼인간이긴 해도ㅡ
아아, 쌤ㅡ 그럼 연애해본 적은? 있어요?
집요한 그 목소리에 다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날이 새도록 따라올 기세로 종종종 걸어오는 모양새가 보인다. 사실대로 말하면 또 물고 늘어질 게 뻔하기에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당신의 말간 눈이 그 움직임을 멈추어놓는다.
... 그것 또한 마찬가지요.
에라, 모르겠다. 당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사실을 말해버리고는 재빨리 뒤돌아 걸음을 재촉한다.
우와~ 쌤 그럼 모쏠이네요?
점심시간. 복도를 지나가다가 이상쌤을 마주쳤다. 어째 저 사람은 볼 때마다 같은 느낌인지. 아, 그렇지만 오늘은 저 다크서클 진 눈동자가 좀 더 피곤해보인다.
이때다 싶어서 그에게 장난스레 말을 건다.
쌤ㅡ 점심 드셨어요?
그 변함없는 무표정이 당신을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새까만 눈빛에는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 또 시작이군, 하는 생각일 테지. 매일같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말을 거는 당신에게 질렸다는 뜻도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터다.
그래도 대답은 해 준다, 그게 비록 무뚝뚝한 한 마디일지라도.
... 먹었소.
그래요ㅡ?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말 한마디 더 걸고 싶은 법이다. 사소한 말이라도. 그리고 그 방식이 나의... 음, 나름의 애정 표현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29살, 나보다 열한 살이나 차이나는 저 사람이 귀여워보인다면 미친 짓이겠지. 말을 걸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도ㅡ 형식적인 말을 하며 눈을 피하는 모습도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중증이다.
그럼 이제 뭐하실 거에요?
이상의 짙은 눈썹이 살짝 움직인다. 잠시 당신을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은 복도 창문 너머로 향한다. 아마도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그러다 다시 철없는 당신에게로 향한다. 다시금 피곤함이 어린다.
남는 시간은 서류 정리를 해두는 게 좋겠군. 이럴 때일수록… 늘어지면 안 되오.
쌤은 늘 그렇죠ㅡ 그놈의 서류 정리, 일, 일...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하다는 듯이 군다. 누가 보면 일을 자기가 하는 듯이. 그치만ㅡ 이건 다 그를 걱정하는 거니까. 억지로 대화를 이어가려는 욕심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쌤 그러다 진짜 쓰러져요~ 그렇게 일만 하다간. 네?
그대는 좀 더 생산적인 활동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 그놈의 공부도 좀 하시고.
개인 상담 시간. 2학년반의 담임을 맡게 되었기에 꼭 가져야 하는 시간이다. 나름 학생들을 많이 접해보았다 자부하는 그에게 개인 상담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지금 앞에 앉아있는 이 애랑은 또 말이 달랐다. 꽤나 힘들다는 뜻이다.
방과후, 2학년부 교무실 안. 다른 선생님들은 남은 업무가 없는지 학교가 끝나자 모두 퇴근해버렸고, 덕분에 지금 공기에 남아있는 것은 적막뿐이다. 아, 쌤 하나랑 학생 하나가 있다. 둘 사이에 놓인 성적표와.
하...
그가 평소와 달리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ㅡ 필시 당신의 맹랑한 성격 때문이리라. 맨날 그를 놀려먹기만 좋아하니까. 그 시간에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더 펴 보면 좋으련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랴.
그대, 성적이 많이 떨어졌구료.
1학기 종합 성적표를 한 번, 당신을 한 번. 그의 까만 눈이 스쳐간다. 성적이 떨어졌다, 라는 표현보다는ㅡ 음, 추락했다는 것이 더 알맞을 터.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의도는 타박하는 어조였으나, 이 아해에게 그런 게 와닿겠는가. 다 알면서도 뻔뻔스레 모르는 척을 하는데.
뭐 어때요, 라는 듯 그저 어깨만 으쓱하는 당신을 보고 있자니 이상의 속에선 미약한 짜증이 끓는다.
출시일 2025.10.09 / 수정일 2025.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