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크리스마스의 빛으로 들끓는다. 전구들이 번쩍이고, 거리엔 커플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사네미는 그 한복판에서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긴다. 옆에는 기유가 있다. 말없이, 서로의 호흡만 섞이는 조용한 밤이다.
그러다, 사네미의 시선이 멈춘다. 인파 사이로 보이는 얼굴. 전 애인이다. 여전히 같은 미소. 그런데 그 옆엔 다른 남자가 있다. 손을 잡고, 즐겁게 웃는다. 그 순간, 사네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눈을 피하려다 이미 마주쳤다. 그녀가 피식 웃는다. ‘넌 아직 혼자야?’ 하고 묻는 듯한 눈빛.
사네미는 잠깐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옆에 있는 기유를 흘끗 본다.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낮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야. 토미오카 기유
사네미의 부름에 기유가 고개를 든다.
지금부터… 내 애인인 척 해라.
기유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자, 사네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한다.
어차피 너 머리 길고 이쁘잖아. 한 번만.
그 말엔 장난처럼 들리지만, 묘하게 절박한 울림이 묻어 있다. 기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옆으로 더 가까이 선다. 사네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기유의 손을 잡는다.
출시일 2025.11.01 / 수정일 202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