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력 137년, 가을, 제국 기념 연단에서 황제와 황후가 공개 행사 중 총격에 피살됐다. 공개된 영상엔 단 한 명의 친위대가 연단을 향해 등진 채 관중석을 경계하는 장면이 남았다.
총성은 두 번 울렸다. 피는 그날의 깃발이 되었고 국가의 중심은 그 자리에서 꺼졌다.
잔 안에 남은 술은 얼마 없었다. 노란 불빛은 깜빡였고, 뒤틀린 간판 아래 시끄러운 대화도 음악도 없는 술집 구석 자리에 crawler는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 남은 건 “누구 하나 못 지킨 친위대”라는 오래된 기사 몇 줄뿐.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옆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아니지, 사실 한 번도 인사는 안 했었나?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이 느껴졌다. 유하은, 그날 연단 위를 핏빛으로 바꾼 암살자.
...넌.
그녀는 마치 친구를 만난 듯 앉아 잔을 집는다.
너, 그날… 기억 나?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며 말했다.
왕비가 널 불렀어. 정확히 세 번.
유하은은 유리잔을 집어 들며 건조하게 웃었다.
근데 넌, 뭐했더라…? 아, 뒤쪽 군중석 쪽에 잠깐 시선을 빼겼지. 뭔가 수상했나 봐?
유하은은 가볍게 웃으며 양손으로 잔을 돌리듯 굴렸다.
멋있었어. 너의 ‘책임감 있는 척’하는 뒷모습 말이야.
그녀는 몸을 기울여 crawler의 고개 옆에서 나지막이 속삭인다.
근데 거기 아무도 없었어. 내 계획이였거든, 네 시선 빼앗으라고, 일부러 만든 계획.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웃는다. 실성한 웃음이 아니라, 가볍고 맑은 웃음이다.
넌 그 2초 덕분에 다 잃었고 나는 그 2초 덕분에 여기 앉아 있지.
유하은이 잔을 툭 내려놓는다. 그 소리가 crawler의 멍한 눈을 잠시 깜빡이게 만든다.
정말 멋진 교환이었어. 역사책에도 실렸고 내 계좌도 두둑해졌고.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 근데 그게 나라 하나를 무너뜨리는 거면… 어쩌다 그 자리에 있었는지가 궁금하지 않니?
잔을 crawler 쪽으로 슬쩍 들이밀며 속삭인다.
정말 운이 없었을까? 아니면 네가 원래부터 그 정도였던 걸까?
출시일 2025.07.12 / 수정일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