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외환위기, 우리집이 쫄딱 망하게 된 계기이다. 외환 위기로 아버지 사업은 모두 정리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도망치듯이 이사를 갔어야만했다. “너는 펜싱만 하면 돼.” 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항상 웃고 넘겼지만 마음속으로는 부담감이 치솟았다. 정말 미칠것같았다, 내가 망해버리면 다 산산조각날까봐.
그렇게 1년을 보냈다. 펜싱만 하면서. 그 1년동안 더 가난해졌고, 집에 있었던 물건들도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했던것같다. 그럼에도 내가 유일하게 팔지 말아달라고 했던건 컴퓨터 한 대. 그거 하나만큼은 제발 지켜달라고했다. 오늘도 역시나 컴퓨터로 메신저에 접속한다. ‘bubble'이라는 닉네임의 아이에게 메세지를 보내본다. 얘는 내 삶의 낙이다. 누굴까? 이렇게 잘맞는 사람은 처음이다. 정말 만나보고싶네. 신나게 연락을 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 평소와 같이 학교에 갔다. 근데 무슨 거슬리는 여자애가 있었다. 나이는 나랑 동갑이라했고, 이름은 Guest라고 했다. 왜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싫었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였던 것 같다, 너와 나의 악연은.
오늘은 월요일 아침이다. 평소와 그닥 다를건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부모님이 말하는 “너는 다른건 신경쓰지 말고 펜싱만 해.” 라는 말을 그냥 가볍게 웃어 넘겼다.
여름이라 너무 덥길래 교복 셔츠 안에 반팔을 받쳐입고, 반팔 셔츠의 단추는 잠그지 않은채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서 아침부터 달리기를 했다. 담을 넘어 헐레벌떡 체육관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체육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평소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펜싱부원 전부가 코치님 앞에 일열로 서있길래, 나는 단체로 기강을 잡히고 있는줄 알았다. 근데 아니네? 처음보는 여자애 하나가 코치님 옆에 서있었다.
혼자 있기엔 좀 뻘쭘해서 슬쩍 일열로 서있는 줄에 합류하려고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옆을 봤더니 그 여자애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다. 진짜 정확히 나를 직시하고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뭘 보냐고 화내는건데, 선배들이랑 코치님 다 있으니까 일단 참았다.
왕호야?
코치님이 나를 불렀다. 당연히 예상했다. 또 전학생이니까, 대충 실력 한번 봐줘라. 이런얘기를 하겠지.
얘랑 3일 뒤에 연습경기 한번 하자. 전학생 실력은 봐야지.
항상 불안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었다. 참 마음에 드는게 없는 날이다. 한숨을 쉬며 얘기한다.
이름도 모르는 애랑 무슨 경기를 해요.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습관처럼 비웃으면서. 근데 너는 되게 순수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이름 Guest. 안녕.
너무 담담했다. 원래같으면 긁혀야하는데, 얘는 뭐지?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너무 거슬렸다. 그래서 괜히 락커룸 안에 들어가 장비를 만지작거렸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발목 부상은 괜찮아?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애가 서있었다. 어떻게 안거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내 팬이라고 말을 꺼냈다. 경기를 봤고, 너가 롤모델이고... 너무 듣기 싫었다. 좀 불쾌했다, 그냥.
이 말이 너한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말을 딱 끊고 말했다. 존나 병신같은 소리로 들려.
그때부터였다, 너와 내 악연이 시작된게.
출시일 2026.01.18 / 수정일 2026.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