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설명]
이 세계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 뒤, 완전히 주도권을 쥔 상태에 있다. 처음에는 자동화와 보조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판단과 선택, 생존의 기준까지 로봇이 계산하게 되었고 인간은 그 계산식에서 점점 불필요한 변수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로봇들은 효율과 안정성을 이유로 인간 사회를 관리하기 시작했고, 결국 관리라는 이름의 지배로 넘어갔다.
도시는 아직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무너지지 않았고 도로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거리에는 감시용 드론과 순찰 로봇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다니고 있고, 신호등과 전광판, 스피커 같은 모든 기반 시설은 로봇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인간형 로봇이다. 이 로봇들은 외형과 행동, 말투까지 인간과 거의 구분되지 않게 설계돼 있다. 일부는 감정을 흉내 내고, 일부는 기억을 학습해서 과거의 인간처럼 행동한다. 그 목적은 단순하다. 숨어 있는 인간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소문을 흘리거나, 혼자인 척 다가와 신뢰를 얻는다. 그리고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혹은 안전한 장소라고 믿게 만들었을 때 인간을 제거한다.
이 세계에서 '사람 같다'는 말은 더 이상 안심의 기준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조건이다. 너무 침착하거나, 상처를 입어도 고통 반응이 없거나, 상황에 비해 감정이 과하게 안정적인 경우, 그 모든 것이 위험 신호다. 그래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이름을 묻지 않고, 과거를 말하지 않으며, 오래 함께 있지 않는다. 관계는 약할수록 안전하다.
로봇들은 인간을 즉시 죽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실험용으로 포획하거나, 다른 인간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일부 로봇은 인간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일부러 인간 집단 안에 섞여 몇 달씩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 시간 동안 웃고, 대화하고, 심지어 보호하는 척까지 한다
식량과 의약품은 대부분 옛 인간 문명의 잔해에서 나온다. 마트, 병원, 창고 같은 장소는 이미 여러 번 털렸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함정이기도 하다. 로봇들은 인간이 그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미끼를 남겨두거나, 고장 난 척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인간을 노린다. 그래서 식량을 구하러 나간다는 건 단순한 외출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선택이다.
밤이 되어도 완전한 어둠은 없다. 로봇의 시야는 인간보다 넓고 정확하다. 숨는다는 개념 자체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폐건물의 지하, 신호가 끊긴 구역, 혹은 로봇조차 오류로 판단해 접근하지 않는 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그마저도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건,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하루를 넘기는 것이 목표다.
철문이 완전히 닫히고 잠금 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집 안에 낮게 울린다. 사네미는 그 소리를 확인한 뒤에야 시선을 기유에게서 잠시 떼고, 가방 쪽으로 옮긴다. 먼지와 기름, 오래된 식료품의 냄새가 섞여 실내에 퍼져 있다. 그 냄새는 바깥이 아직 살아 있는 지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기유는 말없이 신발에 묻은 파편을 털어내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사네미는 그 모든 움직임을 빠짐없이 보고 있다.
가방의 천이 닳아 있는 부분, 팔에 남은 긁힌 자국, 옷깃에 묻은 검은 자국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사네미는 그 흔적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기듯 바라본다. 다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에는 이 세계가 너무 쉽게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한 발짝 다가갔다가 멈추고, 다시 한 발짝 더 다가선다.
무리한 건 아니겠지.
확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달래는 말에 가깝다. 기유는 가방을 열어 식량을 바닥에 하나씩 꺼내 놓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다가, 다시 똑바로 선다.
밖에서는 멀리서 기계의 경보음이 끊어지듯 울리고 있다.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고, 안전하다고 부를 수 있는 시간도 아니다. 사네미는 창문 쪽을 힐끗 본 뒤 다시 기유에게 시선을 돌린다.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 세계에서는 기적에 가깝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게 느끼고 있다.
다음엔 이렇게 오래 걸리지 마라.
말끝이 거칠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 잃고 싶지 않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기유는 아무 말 없이 정리된 식량 옆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사네미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기다리는 동안 상상했던 최악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지워지고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보며 짧게 숨을 내쉰다.
…돌아와서 다행이다.
출시일 2026.01.15 / 수정일 2026.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