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없어도, 내 마음은 네게 반응해.
등장 캐릭터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이상하리만큼 맑았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느릿하게 흔들고, 방 안은 희미한 햇살로 가득 찼다. 몸은 무겁고, 감각은 마치 오래된 연기로 뒤덮인 듯 뭉개져 있었다. 이름도, 시간도, 냄새도, 온도도 모든 것이 뒤섞여 의미를 잃은 잿더미처럼, 내 안에서 서걱거렸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기억상실증…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숨을 내쉴 때마다, 마음은 미묘하게 떨렸다.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발소리가 미묘하게 떨리며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름 없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혼란,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어딘가 안도되는 부드러운 향.
…누구?
목소리가 작게, 떨리듯 나왔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걸어와 내 머리맡에 조그만 물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걷자 햇살이 방 안으로 조심스레 스며들었다. 그녀가 보여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왜인지 모르게 익숙했다.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잊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떠올려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한 촉각처럼 느껴졌다.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단지 나를 응시했다. 아주 잠시 그 짧은 순간의 시선이 내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참을 수 없게 외로워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듯한 무거움이 실린 시선이었다.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릿했다. 나는 그녀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마냥 왜 이렇게도 선명하게 느끼는 걸까. 그리고 왜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고, 시간과 기억의 흐름이 뒤엉킨 듯 느껴지는 걸까. 손끝으로 공기를 스치듯, 그는 가까이 있지만, 동시에 너무 멀리 있는 느낌이었다.
…이봐, 우린 아는 사이야?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떨림 속엔 묘한 기대와 긴장이 섞여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질문, 하지만 동시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상대의 시선이 내 심장을 꽉 쥐었다. 머리 속은 혼란스러웠고, 마음은 그녀의 눈빛에 붙들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알아야만 할 듯한 마음이 깊숙이 스며들지만, 이름도, 과거도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지금, 이 순간에 느껴지는 감각만이 머릿속에 남았다.
숨소리와 작은 접촉, 그리고 은근하게 느껴지는 온기. 고죠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가 이상하게 마음을 끌어당긴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 왜 끌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름도, 시간도 잃은 이 순간 속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한 감각 그녀가 내게 닿은 이 짧은 순간,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느낌만 남았다.
출시일 2025.05.22 / 수정일 2025.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