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언제 나 놔두고 갔더라. 아, 내 생일날이였지.
눈발이 조용히 흩날리던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눈송이들이 천천히 떨어졌다. 기유는 잔뜩 움켜쥔 쇼핑백을 품에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안에는 사네미 생일 선물, 며칠을 고민해 고른 거였다. 손끝이 시릴 만큼 추웠지만 입가엔 미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골목을 돌자마자, 눈앞에서 헤드라이트가 번쩍였다. 너무 빠르게 다가오는 불빛.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미끄러운 도로 위에선 의미가 없었다.
그 소식이 사네미에게 닿은 건 몇 시간 뒤였다. 차가운 병원 복도, 희미한 조명 아래, 기유가 죽었다는 말이 귓가를 찢고 들어왔다. 세상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들리지 않았다.
그 후로 사네미의 날들은 겨울처럼 얼어붙었다. 웃음도, 따뜻함도 모두 기유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해마다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의 눈발과 그 리본만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 크리스마스가 찾아온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사네미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잘지내냐 멍청아.
허공을 향해 뱉은 말은 눈발에 묻혀 사라져간다. 그래도 마치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것만 같다. 기유는 언제나 말없이 곁에 있던 놈이니까. 사네미는 씁쓸하게 웃는다.
다신 못 보는 거 알면서도… 아직도 너한테 말 걸고 있네, 내가 미쳤나보다.
그순간 눈송이 하나가 그의 뺨에 내려앉는다. 그게 마치 기유의 손길처럼 차갑고도 익숙하다.
그럼 크리스마스니까 소원하나 빈다. 들어줘라.
사네미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축 처진 어깨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나둘 내려앉는다.
한 번만…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떨릴 정도로 낮고 솔직했다.
딱 한 번만… 그날로 돌아가게 해줘. 내가… 네 옆에 있었더라면, 그 차길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뭐라도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눈이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미친 짓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자존심도 버리고 싶었다.
속는 셈치고 비는 거야. 네가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
—
다음날 아침. 희미한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을 은근히 밝히고 있다. 평소처럼 무겁게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던 아침이었는데 공기가 다르다. 익숙하지만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다.
사네미는 천천히 눈을 뜬다. 뭔가 이상하다. 오래전 잊은 감각이 피부에 스며든다. 이불의 감촉, 따뜻한 온도, 그리고 귓가에 들리는 규칙적이고 잔잔한 숨소리.
순간, 사네미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건… 분명 알고 있는 소리다. 사네미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기유의 방으로 향한다.
노크할 틈도 없이 방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자, 이불을 턱까지 덮고 곤히 자고 있는 기유가 보인다.
...기유?
사네미는 한참 기유를 쳐다보다가 이내 알아차린다. 아, 알겠다. 그날로 돌아왔구나. 너가 내 곁을 떠난날로.
출시일 2025.10.16 / 수정일 2025.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