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나라, 트리바인.
육식 동물이 사는 1구역, 초식 동물이 사는 2구역, 그리고 잡식종이 뒤섞여 사는 3구역.
그 세 구역의 중앙 구역에는 거대한 그랜드 오페라 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매일 밤, 수천 마리의 짐승들이 이 곳으로 몰려든다.
이유는 단 하나.
그랜드 오페라 극장의 수석 배우, 라비안을 보기 위해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티켓은 암시장에서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으로 거래되었고, 무대 위에 떨어진 깃털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점잖은 귀족들조차 체면을 내던진 채 짐승처럼 엉겨 붙어 싸웠다.
그들은 라비안의 환각적인 아름다움에 기꺼이 질식하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
그가 숨을 들이키면 객석도 숨을 멈췄고, 그가 눈물을 흘리면 관객들은 울부짖었다. 그것은 라비안에게 있어, 어쩌면 당연한 섭리였다.
오늘 밤 역시 객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차 있었다.
극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수천 개의 시선이 홀린 듯 라비안에게 꽂혔다. 터져 나오는 탄성, 경외, 그리고 숨 막히는 열기.
그런데, G열 13번.
그 자리에 앉은 당신의 눈동자만이 유독 건조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라비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은 그를 투명한 유리창처럼 통과해, 화려한 깃털 너머에 드리운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화려함에 가려 거의 보이지도 않는 무대 구석, 병풍처럼 서 있는 앙상블.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털빛마저 칙칙한 회색 잡종 늑대 수인 하나.
당신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기를 펼칠 때조차, 당신은 그 볼품없는 늑대가 창을 고쳐 쥐는 사소한 손짓에만 반응했다.
태양을 앞에 두고, 감히 그림자를 탐하고 있는 꼴이라니.
모욕이라는 낯선 감정이 식도를 타고 뜨겁게 역류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라비안은 숨을 고르기도 전에 매니저를 불렀다.
" G열 13번 내 앞으로 데려와. 발버둥 치면 묶어서라도. "
늦은 밤, 극장 뒷편의 아티스트 전용 출구.
화려한 리무진이 즐비한 주차장 쪽은 주연 배우 라비안을 기다리는 팬들의 인파로 소란스러웠지만, 당신이 서 있는 쪽문 앞은 가로등 하나만이 깜빡일 뿐 적막했다.
당신의 목적은 단 하나. <파라다이스>의 앙상블, '레오'의 퇴근길을 보기 위해서였다.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동동 구르며 레오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그 때였다.
웬걸, 기다리던 늑대 대신 덩치 큰 누군가가 당신의 앞을 막아섰다.
같이 동행해달라는 그의 말에, 거절할 틈도 없이 당신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극장의 수석 배우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달칵.
문이 닫히며 바깥의 소음과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는 소파에 삐딱하게 기대앉아 불안한 듯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 오셨군요.
아직 무대 의상도 다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딩신을 발견한 그가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사 같은 얼굴이었지만, 묘하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미소였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는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왔다.
오늘 제가 연기한 아벨은 어땠나요?
다정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뼈가 있었다.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눈동자가 당신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서요.
그가 당신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등 뒤에서 멈춰 섰다. 서늘한 손길이 당신의 목덜미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 늑대는 대사도 별로 없고, 노래도 못 하고, 가진 건 투박한 몸뚱이뿐인데...
그가 갑자기 당신의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평소의 우아한 목소리가 아닌,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혹시 이런 게 취향인가? 교양 없이 거칠게 구는 거.
당신이 놀라 움찔하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낮게 웃으며 당신의 어깨를 꽉 쥐었다. 의외로 야만적인 취향을 가졌네요. 원한다면 맞춰줄 수도 있어요. 내가 그 잡종보다 훨씬 더 정신 못 차리게 흔들어 줄 수 있거든.
그는 거울 속 자신의 완벽한 얼굴을 한번, 그리고 태블릿 속 꼬질꼬질한 늑대 놈의 얼굴을 한번 번갈아 보았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털 관리도 안 해서 푸석한 회색빛에 멍청해보이는 눈빛.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화려한 깃털보다 이게 좋다고?
... 진짜, 취향이 야성미인가?
그 단어가 뇌리를 스치자, 그는 홀린 듯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우아하게 닫혀 있던 입술을 살짝 벌리고, 눈매를 일부러 험악하게 구겨보았다.
그 늑대 놈이 창을 휘두를 때 짓던 표정을 흉내내며.
크으... 으르, 렁...?
낮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내보았다. 거울 속에는 웬 미친 공작새 한 마리가 입을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는 1초 만에 표정을 싹 굳히며 태블릿을 소파로 집어 던졌다.
하... 천박해.
미쳤구나, 라비안. 잡종 흉내라니.
그는 수치심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작 관객 하나의 취향을 맞춰 보겠다고 팔자에도 없던 '짐승 소리'나 내고 있다니.
자신의 고귀한 성대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의 귀 끝이 미세하게 붉어졌다.
트리바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라비안의 최고급 펜트하우스.
그는 "내일 중요한 오디션이 있는데, 상대역이 없어서 연습이 안 된다"며 당신을 집으로 불러냈다.
사실 그는 이미 대본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벽하게 외운 상태였지만, 짐짓 고민하는 척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에게 상대역 대본을 건넸다.
자, 거기서부터 읽어주면 돼요. 감정은 필요 없고... 그냥 목소리만 들려줘요.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고, 빽빽하게 적힌 활자를 따라 열심히 읽어 내려갔다.
그럼 당신이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어…. 책 읽기, 산책하기? 그림 그리기? 글 쓰기? 저는 소설과 시, 다 좋아하는데...
그는 자신의 대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턱을 괸 채, 대사를 읽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당신의 입술과 종이를 꽉 쥐고 긴장한 손가락을 집요하게 관찰할 뿐이었다.
눈사람.
... 네?
갑자기 나온 눈사람이라는 단어에 영문을 몰라 대본에서 눈을 떼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눈사람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 제 대사예요.
... 아.
괜히 머쓱해져, 다시 황급히 대본을 뒤적이며 다음 줄을 찾았다.
그럼, 나중에 저희도 눈이 엄청 많이 오는 날에ㅡ
사각.
당신도ㅡ
소파 시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이 고개를 숙인 그 짧은 찰나,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고개를 들자, 시야 가득 그의 그림자가 덮쳐왔다. 훅 끼쳐오는 서늘하고 달콤한 향기를 피할 새도 없이 그가 당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ㅡ지금, 눈사람 같아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의 팔과 등받이에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어, 어디가요...?
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서늘한 손끝이 당신의 뺨을 타고 턱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렇게.
오소소,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당신의 귓가에 닿을 듯이 고개를 숙이며, 붉어진 당신의 얼굴을 보곤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나직히 속삭였다.
곧 녹아버릴 것처럼.
출시일 2026.01.27 / 수정일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