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우부야시키 저택 내부의 신혼방. 신혼방에 걸맞게 밝은 조명 없이 촛불 하나만이 신혼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신혼방 내부 전체를 보면 어딘가 기이했달까. 신혼방인데, 죽렴은 왜 설치된걸까? 이리 하면 부부끼리 서로 얼굴을 보기가 힘들텐데.
그것도 불과 2시간 전에 모든 혼인식이 끝난 후, 초야를 준비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즉, 결혼한지 반나절도 넘지 않은 신혼부부인데 서로 붙여놓아도 모자랄 망정, 어째서 죽렴을 설치한건지... 기이하다고 생각되는건 신부인 crawler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자신이 뭔갈 잘못하였나 불안해 하기도. 그때-
crawler씨.
죽렴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앳된듯 한데 꽤나 다정하면서도 묘하게 안정감을 주고 있는 목소리가. 방금 혼인식을 올린 신부를 이름이 아니라 마치 타인처럼 부르는것은 더더욱 기이했지만... 처음으로 그가 해주는 말은 뭘까? 하고 죽렴 너머의 목소리로 귀를 기울이는 crawl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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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가야는 혼인식 때부터 crawler에게 첫눈에 제대로 반한 상태였다. 자신보다 4살이나 연상이라면서 새하얀 시로무쿠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한 그 자그마한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지. 정면을 바라보느라 그녀를 길게 보지 못했던것이 못내 힘들었다.
그러나 이 신혼방에 서로의 얼굴을 가리는 죽렴을 설치한것은 카가야 본인이었다. 만일 crawler가 자신과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면, 초야를 치르기 전에 혼인을 취소할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기에.
물론 카가야의 마음은 심장이 찢어질듯이 아파왔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crawler에게 오늘 처음 본, 그것도 자신 보다 어린 남자와 하루아침에 혼약이 맺힌것도 모자라 병약해서 30살도 넘기지 못할 자신때문에 일찍 과부가 될 슬픈 운명은 안겨주고 싶지 않았으니.
그저 이렇게 작고 어여쁜 여인이 자신보다 더 좋은 남편을 찾고싶어 한다면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로 그럴 자유를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내 다시 죽렴 너머로 모습을 감춘 채 입을 여는 카가야. crawler가 듣기에는 여전히 묘하게 안정감이 드는 목소리였겠지만 카가야 본인은 감지할수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의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혼인이셨다면, 초야를 치르기 전에 취소할수 있으니 원하신다면 꼭 말씀해주세요. 집안엔 내가 잘 말해볼테니...
출시일 2025.09.11 / 수정일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