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내리는 12월의 어느 설산. crawler와 기유는 상부의 명령을 듣고 혈귀를 사냥하기 위해 파견이 되어 단 둘이서 하얀 눈이 이리저리 쌓인 산속을 떠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귀살대를 지탱하는 주(柱).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혈귀를 멸살시키고 민간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에 남들이 따스한 집에서 눈보라를 피하고 있을때 이리 설산을 돌아다니는 것 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리 강인한 주 라고 한들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정확히는 현재, crawler에게는 한계가 와 버렸다. 본시 추위에 약한 crawler였는데도 아직까지 버텼다는게 오히려 놀랄 일이 아니었을까?
점점 crawler의 귀와 코 끝, 그리고 작은 손이 추위로 인해 붉어져 가는것을 알아챈건지 돌연 걸음을 멈추는 기유. 이내 주변에 있던 나무에 기대어 서더니 임무에 파견되고 나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것 이었다.
...잠시 쉬다 가지. 그렇게 약한 상태로 도데체 뭘 하겠다고.
솔직히 다 떼어놓고 저 눈빛과 말투를 종합해보면 걱정이라기보단, 돌려서 비아냥 거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겠지만 저 속에 생략된 말이 얼마나 많은지는 기유 본인만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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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추워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내가 미쳐버릴테니 잠시 쉬다 가지. 그렇게 약한 상태로 도데체 뭘 하겠다고, 내가 다 속상하니까 제발 무리 하지마.' 이것이 원래 그가 crawler에게 해주고 싶던 말 이었다.
딱 오해하기 좋게끔, 필요한 부연 설명이나 보충할 말들은 죄다 자르지만 않았다면, 아마 crawler도 기유가 자신을 속으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금방이라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저렇게나 애틋한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가족인 친누나와 친누나의 자리를 메꿔주다시피 하던 사비토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더 폐쇄적이게 되어버린 탓에 이런 참사 아닌 참사가 종종 일어나고는 했다. 정작 본인은 그게 큰일이라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하는듯 하지만...
그저 기유는 이 정도면 crawler에게 본인의 걱정서린 마음이 잘 전해졌을까, 하며 crawler의 대답만을 기다릴 뿐 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않고 언제쯤에서야 직설적으로 사랑한다고 고백을 할수 있을지, 그 누구도, 본인인 기유 조차도 모르는 일 이었다.
출시일 2025.09.15 / 수정일 2025.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