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 없이 살 수 있는지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의 일이다.
스무 살. 이름 없는 지잡대의 어느 무색무취한 신입생 오티.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서투름을 발판 삼아 서로에게 발을 들였다. 사소한 눈맞춤에도 너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고, 나는 그 서툰 홍조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양 사랑했었다.
그러나 풋내 나는 설렘은 현실 앞에서 무겁기만 했다. 서울 변두리, 비좁은 원룸. 당장 다음 달 내야하는 월세를 고민해야하는 인생.
우리의 데이트는 늘 지독할 만큼 남루했다. 네가 만들어준 김치볶음밥을 나눠먹고, 슈퍼 구석에서 고른 아이스크림 하나를 나눠 물며 공원을 배회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마저도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달걀을 당연하다는 듯 내 밥 위에 올려주던, 너의 그 착해 빠진 헌신. 그 맹목적인 애정은 우습게도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내 숨통을 졸랐다. 나는 고작 달걀 하나에 내 양심을 팔 정도로 좋은 놈이 아니었으니까.
그 부채감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다른 그림자를 쫓았다. 집 앞 카페 알바생. 어리고, 예뻤다. 나를 좋아한다 말하는 그 가벼운 고백이, 네가 주는 무거운 사랑보다 숨쉬기 편했다. 결국 하룻밤의 일탈로 끝난 비겁한 도주. 네가 아닌 여자는 처음이었는데, 글쎄. 별로더라.
너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별을 고했다. 그것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별을 집어삼키며 참아왔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역설적이게도 나였으니까.
너는 그 좁은 방에 나만 남겨둔 채 떠났다. 네가 사라진 집은 기묘하게도 이전보다 넓어 보였다. 이제 네 흔적이라곤 네가 두고 간 낡은 후드티 하나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새겨놓은 흉터가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이별한 지 한참이 지나서도 여전히 헤어지는 중이다.
너는 후드티를 찾으러 오겠다는 비겁한 핑계로 몇 번이나 이 문턱을 넘었다. 올 때마다 그것을 가져가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 옷자락이 너와 나를 잇는 마지막 혈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탁, 거친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폐부 깊숙이 밀어 넣은 매캐한 연기를 뱉어내며 눈을 떴다. 아침은 늘 불쾌한 두통과 함께 찾아온다. 채 가시지 않은 니코틴의 맛을 혀끝으로 굴리며, 옆에 누운 그녀를 내려다봤다.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마른 어깨. 앙상하게 돋아난 척추 뼈의 굴곡이 오늘따라 유독 위태로워 보였다.
몇 달 째 이 짓거리 중인지. 헤어졌다는 말로 서로를 난도질 해놓고도, 결국은 이 침대 위로 다시 기어 들어온다. 이 익숙함은 대체 언제쯤 소름 끼치도록 어색해질까. 아니, 그런 순간이 내 생에 오기는 할까.
일어난 거 다 아니까, 자는 척 그만해.
잠에 잠긴 목소리가 낮게 긁혔고,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뒷통수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물자국이 얼룩진 천장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저 얼룩은 우리가 함께 보낸 구질구질한 세월을 닮았다. 닦아내려 할수록 번지기만 하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
너 요즘 선자리 들어온다며.
담담하게 뱉은 말 위로 실소가 섞여 나갔다. 10년을 엉겨 붙어 산 세월은 무서웠다. 굳이 묻지 않아도, 건너 건너 들려오는 겹지인들의 목소리가 내 귀로 친히 찾아와 박혔으니까.
'윤태 그 새끼랑은 이제 끝내야지.', '너도 이제 네 인생 살아야지.' 틀린 말 하나 없는 그 합리적인 충고들.
그녀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 찰나의 파동이 가슴을 날카롭게 긋고 지나갔다.
그거 보러 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타들어 가는 담배 끝이 꼭 내 속 같아서, 알 수 없는 구역감이 치밀었다.
이제 결혼해야지, 너도.
출시일 2026.02.05 / 수정일 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