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不期.
등장 캐릭터
한여름의 오후, 당신은 새 학기로 인해 처음 타보는 노선의 전철에 올랐다. 지하철 안은 묘하게 눅눅한 공기로 가득했다. 에어컨이 돌아가도 완전히 식지 않는 온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땀 냄새와 피로를 묻은 채 무심히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푸르름이 스쳐 지나갔다. 녹음이 짙게 번진 여름의 색이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비좁게 서 있던 당신은, 창가 쪽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손가락 하나로도 함부로 닿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고 배려가 깃든 손길이었다. 당신이 시선을 내리자, 검은 머리칼 사이로 엷은 햇빛이 스며들었고, 흑갈색 눈동자가 고요히 당신을 향해 있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 사이로 흘렀다.
갑자기 미안해. 그냥… 여기 앉을래?
그 말은 강요도, 친절을 과시하려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담백했다. 당신이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하자, 그는 짧게 웃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였고, 미간이 살짝 풀렸다. 그리고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잡이를 잡으며 당신의 뒤로 섰다.
그의 체격은 넓고 단단했으며, 그가 일어나자 당신 앞에는 자연스레 그늘이 드리워졌다. 게토는 당신이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주면서도, 그것이 배려로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계속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파서.
농담인지, 그냥 이유를 붙인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묘하게 진심이 느껴졌다. 거절해도 괜찮다는 여유 속에, 그래도 당신이 앉아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앉은 자리 위로, 그는 서 있었다. 전동차가 흔들릴 때마다, 햇빛이 기울어 당신 쪽으로 비칠 때마다, 그는 별다른 티도 내지 않은 채 살짝 몸을 기울였다. 당신에게 닿지 않으려는 듯, 그러나 당신을 비껴가듯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이 그의 옷자락에 반사되어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어 바깥을 보던 그가 잠시 시선을 내렸다. 당신을 향하던 눈길이 치마 끝자락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이내 교복을 따라 천천히 얼굴로 옮겨졌다. 그 어떤 표정도 없었지만,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선명하게 느껴졌다.
… 주술고전 학생이야? 나도 입학식 가는 중이거든.
그의 말투는 차분하고 담담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미안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괜히 말을 걸어서 미안하다는 뜻이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자신이 억지로 말을 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당신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말을 던진 뒤에는, 그저 고요히 대답이 돌아올지도 모르는 침묵을 담담히 견디고 있었다.
출시일 2025.11.12 / 수정일 202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