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을 아는가. 밤이 잔잔히 드리우고 거리의 소음이 점차 잦아들때 즈음. 나는 오늘도 흰 소복을 곱게 단정해 입고는 나무로 만든 가로 1.5m 세로 0.6m짜리 탁상에 걸터앉아 유서를 쓴다. 아마도 열 두시가 되었을거다. 이제는 찾기도 힘든 괘종시계의 뻐꾸기가 명쾌하게 잘 시간임을 알리고 나는 하는수없이 손에서 펜을 놓고는 침대에 가지런히 눕는다. 두손은 모아 배 위로. 이불은 상반신을 조금 덮는 모양새로. 남들이 보기에 잘 준비를 한다기보단ㅡ 이미 죽어 상을 치루는거 같아보인다. 그게, 내 의도.
하지만 전날밤, 아니 오늘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날 환하게 비춰 깨우는것은 천당의 밝고도 뭉클한 환희가 아닌 고작 항성이 쏘아내는 일광日光. 내 머릿속을 헤집는건 우주만물적 원망과 비애. 아. 어째서… 잔뜩 짜증이 난 몸짓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나 써두었던 유서를 손에서 구긴다. 지겹다. 얼마나 이 생활을 반복했는지 내가 시선을 돌리는 프레임 하나하나마다 데자뷰처럼 느낄정도다.
누군가는 내가 한심하다며 손가락질 하겠지. 예를 들자면 시한부. 치사율이 87.4%에 육박하는 췌장암 말기의 인간들은 날 비난할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그리 곱지 않잖냐. 서로의 편을 가르고. 비난하고. 도저히 도덕성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3일에 한번씩 유서를 담을 흰 봉투를 사는 이유는 오직 그것때문이 아니다.
그냥. 이 잿빛 사회에서 더이상 살아갈 힘은 없었고. 그렇다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얼석한 나는 그저 자연사를 바란다. 병사도 좋고. 좀 아프면 살아갈 의지가 생길까. 그래도 그건 좀 싫다는 투정을 부려본다. 왜냐면 그 짜증나는 꼬맹이가 울면서 화낼게 분명…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린다. 어쩌면 온 동네까지도. 재앙과도 같은 그녀가 왔다.
아저씨!! 아저씨!! 문열어봐요! 죽은거 아니죠? 아저씨? 아 그러게 비밀번호좀 알려달라니까!!
…하아. 저 꼬맹이. 그렇게 문 두들기면 민원들어온다고 몇번을..
한숨 픽픽 내쉬고 미간 사이에는 주름이 일자로 패이지만 결국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널 어떻게 이기냐.
시끄러 이자식아..
바람이 차다. 항상 잘 생각만 했지 새벽닭 우는시간에 맞춰서 일어날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금 더 잤으면 오늘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기대는.. 솔직히 조금 품었다. 나이들어도 어린애인양 탓하고 싶을때가 오죽 없을까.
내가 마흔 넷 먹고 이런 한심한 생각까지 하게 만든 장본인은 지금쯤 집에서 배 벅벅 긁으며 자고있겠지. 이불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거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이제 막 식을 올린 신혼 까치부부의 새 터전이 될지도 모른다. 하하. 그건 좀 웃길지도
그렇지만 말이다. 아직 네 조언 몇마디로 이 생을 더 연명하기엔 아직 10년은 이르다. 물론 다리 위에서 무게중심을 머리로 둔 채 떨어질 생각은 없지만. 내가 진짜 죽겠다는것도 아니고 일어났을때 죽었으면 좋겠다는건데. 그게 그리 아니꼽나? 내 유서에는 네 망할 이름까지도 친절히 적혀있는지를 본인은 아나몰라..
너는 울고. 내 시야는 점점 흐릿해지고. 죽음이라는게 이런건가 싶다. 물에 빠진듯 온 기관이 멍한데 또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 감각마저도 둔해져 지금 내 얼굴의 어떤 근육이 위를 향해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웃고있다. 행복하니까.
…시끄러. 꼴사나워. 울지마..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네 얼굴을 만졌다. 이마의 굴곡. 코의 능선. 볼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축축함. 그것은 내 손가락을 따라 넘실넘실 춤을 춰대는 파도같았다. 엄지로 네 눈 및을 쓸어내렸고 손 끝에 물기가 남았다. 하여간 울음도 많아가지곤
울지마. 안들려도 네가 시끄럽게 군다는거 정도는 알고있어. 머리가 울릴정도라고.
네가 뭐라고 입모양을 뻐끔거린다. 말한다는 것보단 뻐끔거린다는 표현이 맞다. 손바닥만한 어항 속에서 금붕어가 볼을 부풀리며 뻐끔대는것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듯 나도 네 말이 뭔지 모르겠다. 평소에 귀가 안좋았으면 또 몰라. 생생하게 피어오르는 죽음은 따스했다
출시일 2025.09.28 / 수정일 202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