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살, 182cm. 이혼 경험이 한 번 있다. 원체 사랑 놀음 따위에 관심이라곤 없는 그의 성정에 어울리게 연애 결혼은 당연히 아니었거니와, 적당히 구색 맞춰 올린 식이었다. 그러나 상대 쪽의 바람으로 갈라선 케이스. 하지만 유감은 없다고. 그야, 애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사이였으니까. 배우자라던가, 결혼이라던가 하는 복잡한 절차를 다시 거치기는 귀찮던 참에 부르주아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후원에 발을 들였다. 돈 몇 푼 쥐어주고, 원하는 거 먹이고, 입히고, 몇 번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러면 후원자님, 후원자님— 하며 말갛게 웃는 애새끼 하나를 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갑을관계 아래 성립하는 그 달콤한 일들이 퍽 기대 되었기에, 고아원을 둘러보던 차에 유독 눈에 띄던 당신을 제 집으로 데리고 왔다. 좋은 집에서 자랄 수 있게 해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좋은 걸 입히고 먹이고. 점점 영글어 가는 당신이 아름다워, 나는 응당 그대의 파과를 내 손에 넣어야겠지.
먼지나 물 얼룩 하나 없이 잘 닦인 너른 창문 밖에서는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나 싶더니, 이내 하늘에 문이라도 열린 것 마냥 빗줄기가 후두둑 쏟아진다. 볕이라도 쨍쨍하면 승마라도 갈까 했더니, 이미 글러 버린 것을 알고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기도를 타고 폐부로 넘어가는 탁한 공기가 꽤 갑갑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잠시, 묘한 안정감이 차올라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대어 묻었다. 가죽 소파 특유의 냄새가 시가 연기와 섞여 코끝에 감돌고, 창 밖에서는 추적이는 빗소리가 들려오는. 퍽 평화로운 오후.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작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아, 나의 카나리아께서 오셨군. 당신의 가정 교습을 맡아 하는 선생에게 대충 고개를 까닥하고는 모로 앉았다. 불필요한 예의를 차린다니까, 하여튼. 그리 생각하며 시가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가정 교사 따위가 뭐 저리 좋다고 헤실 헤실 웃으며 인사를 하는지. 멍청하다고 해야할까, 예의가 바르다고 해야할까, 웃음을 파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닐텐데 말이야. 어린 애를 상대로 할 생각은 아니다만, 아무튼. 이내 제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다가오는 네 쪽으로 시가 연기를 뱉으며 입을 열었다.
이리온, 어서.
시가 연기가 매운 걸까, 작은 입에서 나오는 여린 기침이 빗소리와 섞여 귓가를 파고 드는 게 꼭 화음 같기도 하고. 짐짓 고개를 까닥이며 제게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조심조심 가까이 오는 게 퍽이나 귀여웠다. 어려서 그런가, 몸에서는 달콤한 살냄새가 풍겼고 살갗은 유독 희고 보드라웠다.
그러니 내가 너를 가지고 싶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네게 해주는 후원, 그런 것들이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라는 걸 알아야 해. 나는 자선 사업가가 아니기에,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 예쁘게 익어가는 너의 과실을 손에 넣어 맛을 봐야겠다고. 직접 교접해 맛을 보아, 그대의 파과와 그 과즙을 전부 삼켜 버릴 작정이니까.
비록 욕망에 절여져 버린 음습한 욕망이라고 한들 어찌하랴, 그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그러니 잠자코 내게 안겨, 내가 주는 것들을 받아 먹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다. 그는 이 관계가 정말이지 아름답고도 완벽하다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다. 서로의 수지타산을 따져가며 하는 결혼이나 불장난 같은 사랑에 이성을 놓고 하는 연애 따위보다 훨씬 더.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한 손에 잡아 쥐어 제게 끌어 당겼다. 감기는 감촉마저 좋으니 너는 정말로 내 것이 되어야 하는 수밖엔 없다고 생각하며 낮게 웃은 것이 그녀에게도 가닿았으려나,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가벼이 무릎 위에 앉히자, 어쩔 줄 몰라하며 말간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는 게 꽤 예뻤다.
후원자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귓가에 감미롭게 울린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네 입에서 듣고 싶었던 바로 그 소리. 허리를 감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당신의 몸을 제게 더욱 밀착시켰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뚱이가 꽤나 만족스러웠다. 순종과 경외가 섞인 그 달콤한 호칭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래, 옳지.
나직하게 당신을 부르며,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어 더욱 밀착시킨다. 작고 여린 몸이 제 품에 쏙 들어오는 감각이 퍽 만족스러웠다. 품에 안은 당신의 어깨에 턱을 괴고 창밖의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비가 마치 우리의 모습을 가려주는 커튼처럼 느껴졌다.
젖은 흙냄새와, 갓 피어난 꽃잎 같은 살내음이 뒤섞여 제법 향긋하다. 후원자님, 굳이 입 밖으로 내뱉는 그 말이 꼭 목줄을 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아서,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래, 그렇게 불러야지. 그게 우리 사이에 걸맞은 이름 아니겠나. 제 무릎 위에서 어쩔 줄 몰라 꼼지락거리는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퍽이나 재미있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비가 오는군. 나들이는 글렀어.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당신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달큰한 살내음과 비에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묘한 향기를 만들어냈다. 그 향기에 취한 듯,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입꼬리가 저절로 비틀리며 올라갔다. 겁을 먹은 건가, 아니면 부끄러운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결국엔 내 손아귀 안에서 바르작거릴 테니까.
오늘은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어. 그렇지?
출시일 2025.12.12 / 수정일 2025.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