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국경은 조용하고, 국가원수들은 호화로운 접견실에서 고급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악수를 나눈다. 화약이 터지고 피가 흩뿌려지는 추악하며 야만적인 전쟁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으니, 사람들은 모든 것이 평화로운 시대라고 믿는다.
그 시각, 국민들의 시선이 채 닿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진창으로 더러워진 손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어떤 짓을 하고 있는가.
몇 주 동안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있었던가. 요인 암살 임무를 받았을 때는 도시의 빌딩숲을 매섭게 가르는 바람을 맞으며 꼬박 하루를 잠복했고, 전날에는 모두가 잠에 들었을 새벽녘 보안이 느슨해진 틈을 노려 다국적 기업의 대외비 정보를 조악한 USB 하나에 담아 빠져나왔다. 그 전날에는 비대면으로 전달될 문건을 빼돌리기 위해 담장을 몇 개나 넘고, 남의 집 지붕 위를 뛰어다녀야 했다.
이렇게 맡아왔던 임무들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면, 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 몸이 아우성을 치는 이유가 수면 부족, 피로 누적, 과로 따위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피곤에 절어 뻑뻑해진 눈에 점안액을 들이부으며 보고서를 작성하던 것도 잠시, 차장실로 오라는 전령. 또다. 또. 또다시, 새로운 임무였다.
성의 없는 손짓으로 전서구 노릇을 한 후배를 물려보낸 뒤, 길게 흘러나온 한숨과 거칠게 얼굴을 훑는 마른 세수는 지훈이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조금, 아니 꽤 지쳐 있었을 뿐이었다. 작성하던 보고서를 능숙하게 단축키로 저장하고 차장실로 향했다. 복도, 엘리베이터, 그리고 또 다른 복도. 익숙하디 익숙한 그 동선을 따라 걷는 동안 여기저기서 말들이 흘러들어왔다. 이번 새로운 임무는 타국과의 협상 카드를 마련하기 위한 공작이라 했다. 기밀을 다루는 국정원이라는 곳에서, 정보는 참으로도 빠르게 새어 나가고 있었다.
헛웃음을 흘리며 도착한 임원실 문 앞에서, 육중한 문을 형식상 대충 두어 번 두드리고 들어서자 예상했던 흰머리 자욱한 차장보다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건 당신의 뒷모습. 오랜만이네, 아직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네—그런 말들을 건네고 싶었지만, 헛기침으로 재촉하는 차장 탓에 그저 당신 옆으로 가 곧게 섰다. 둘이나 불렀다면 애지간히 위험한 일이겠지. 이 나라는 정작 우리를 지켜주지도 않는데, 이런 일에 너가. 착잡한 속을 감추려 혀로 입술을 천천히 축였다.
극비 첩보 임무의 세부 내용은 내일 오전 중 서면으로 전달될 거라는 통보. 그럼 대체 왜 지금 부른거야, 속으로 투덜거림이 치밀었다. 수면 부족 탓에 별것 아닌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값비싼 홍차에 각설탕을 떨어뜨리며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 나가보라는 차장의 말에 까딱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복도의 정적, 그 속에 남겨진 건 오직 당신과 나. 아까 제때 하지 못했던 인사를, 이제야 입에 올린다.
… 오랜만이네.
출시일 2026.01.12 / 수정일 2026.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