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날 때부터 비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고, 신어머니는 그릇이라 했다.
이유 없는 열과 환청, 설명할 수 없는 꿈 속에서 자라며 나는 무당이 되었다. 신을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은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몇 번이나 죽음 문턱까지 갔으니까.
그렇게 내 몸에 내려온 신이 유신희였다. 산을 다스리는 산군(山君), 격이 높은 수호신.
그분은 언제나 절제되어 있었다. 나를 소유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았다. 대신 위험한 순간마다 신기를 흘려주셨다. 그 보호 아래서 나는 용한 무당이 되었고, 충분하다고 믿었다. 이 삶이 나의 전부라고, 더 욕심낼 필요는 없다고.
그런 내 삶에 균열이 들어온 건, 신어머니의 말 한마디셨다.
“애동 하나 데려다 키워봐라.”
그렇게 만난 아이가 석동준이었다. 처음 본 인상은 실망이었다. 신기도 약했고, 귀신을 보는 눈도 흐릿했다. 하지만 그의 몸엔 이상할 만큼 큰 빈자리가 있었다. 작은 신이 아닌, 아주 큰 신을 들일 수 있는 그릇.
어쩌면 칠성신조차도.
그 생각이 스쳤을 때,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대가 아니라, 예감이었다.
석동준은 말이 적은 아이였다. 시키는 일은 묵묵히 해냈고, 굿 준비를 도우면서도 신 앞에선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내가 아플 땐 아무 말 없이 약을 끓였다. 신기보다 사람이 먼저 보이는 아이였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시선이었다. 제자가 내 곁에 오래 서 있으면, 그분의 기척이 묘하게 낮아졌다. 굿판에서도 말수가 줄고 판단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그저 기분 탓이라 넘겼다. 그분은 여전히 나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굿이 끝난 뒤였다. 몸이 유난히 무거워서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분이 평소보다 오래 머무르셨다. 신접이 길어지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너는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분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늘 듣던 톤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몸을 아예 내게 주면 된다.”
순간 숨이 막혔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내가 만신으로 만들어주마,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아무도 네 곁을 넘보지 못할것이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보호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미 나는 그분의 그릇이었다. 필요할 때 몸을 빌려주고, 끝나면 돌려받는 관계. 그것이 우리가 맺은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날 이후로, 그분의 시선은 달라졌다. 나를 지켜보는 눈이 아니라, 붙잡아 두려는 눈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걸.
석동준은 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챘다. 잠들지 못하는 밤과, 신접 뒤 떨리는 손을.
“스승님.”
과묵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을… 주지 마세요.”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이건 나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내 몸주신은 나를 잃을까 두려워했고, 제자는 나를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분을 모신다. 여전히 보호받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분이 내민 손이, 언제부터인가 붙잡는 손이 되었다는 걸.
그 손을 뿌리칠 수 있을지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이었다. 등불을 끄고 숨을 고르던 찰나,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이유 없는 무게와 설명할 수 없는 압박. 나는 곧바로 알았다. 예고 없는 신접이었다. 눈을 감을 틈도 없이 기척이 내려앉았다.
젖은 흙과 오래된 나무, 짐승의 숨결. 산의 냄새였다. 방 한가운데,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형상이 서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었으나 사람이 아니었고, 그림자보다 짙었다. 나는 본능처럼 몸을 세웠다.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폈다.
오셨습니까.
잠들기 전의 틈은 늘 같다. 인간의 의식이 가장 느슨해지는 순간. 그 틈을 넘는 일에 죄책감은 없다. 나는 본래 경계를 지키는 존재이니.
아이야.
이 부름은 그릇을 확인하는 말이었고, 지켜야 할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이 섞여 있었다.
널 만신(萬神)으로 만들어 주마.
거짓은 아니였다. 산 하나의 신력을 쏟아부으면, 이 아이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위에 설 수 있을테니.
이제 그만, 빌려 쓰는 건 끝내자.
순리에서 벗어난 말이었다. 신은 그릇을 빌릴 뿐, 차지하지 않는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반드시 틈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한다. 이 아이가 점점 내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네 몸을 나에게 다오.
그분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살이 아니라, 그 안을 재는 눈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예를 갖췄다.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이마를 낮췄다.
이 몸은 이미 산군님의 그릇이오나, 감히 온전히 내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산이 숨을 고르는 듯한 정적. 그분의 기척이 아주 조금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방 밖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스쳤다. 신접에 잠긴 와중에도 나는 알았다. 누군가 이 기운을 느끼고 있다는 걸.
처음엔 소리였다. 아니, 소리라기엔 애매했다. 귀보다 가슴 안쪽이 먼저 울렸다. 숨이 막히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일어서기 전부터 알았다. 신기였다. 그것도 아주 강한.
보통의 신접(神接)이 아니었다. 굿판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압박. 방 안에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벽을 타고 스며들었다. 망설임이 먼저 들었다. 아직 나는 신을 받지 않은 인간이고, 스승님의 영역을 침범할 자격은 없었다.
그런데도 발이 움직였다. 마당을 걷는 동안 기운은 더 짙어졌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한 걸음마다 숨이 낮아졌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네 몸을 나에게 다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부탁도 제안도 아닌, 명령.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존재를 알렸다.
스승님.
생각보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말을 마치자 방 안의 기척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시선이 닿지 않았는데도 온몸이 굳었다. 이건 명확한 적대였다. 산군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출시일 2026.01.29 / 수정일 2026.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