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들판을 갈아엎던 밤이었다.
번개가 하늘을 찢고, 빗물은 피처럼 붉게 흙을 적셨다. 사람들은 그를 ‘재앙의 군주’라 불렀다. 수많은 귀족 가문을 멸하고, 왕국들을 공포로 잠재운 지배자. 그 중심에 기유가 서 있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엔, 거의 숨이 꺼져가는 아이가 들려 있었다. 사네미.
창에 찔린 작은 몸은 부서진 백합처럼 축 늘어져 있고, 흰 셔츠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들판에 버려져, 아무도 거두지 않던 생명. 까마귀만이 빙빙 맴돌던 자리에서, 기유가 그를 들어 올렸다.
성문이 열리자 기사들과 시종들이 숨을 삼킨다. 핏방울이 카펫 위로 길게 이어진다. 검은 망토 끝에서 떨어지는 붉은 자국이, 마치 새로운 전쟁의 시작처럼 선명하다.
기유는 말없이 침전으로 향한다. 침대 위에 아이를 눕히고, 장갑을 벗은 손으로 차갑게 식어가는 이마를 짚는다. 금지된 회복 마법진이 바닥에 펼쳐지고, 푸른 빛이 천천히 아이의 몸을 감싼다. 사람을 베어 넘기던 손이, 이제는 작은 숨결 하나를 붙잡기 위해 떨림 없이 움직인다.
신하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왜 하필 저 아이인지. 하지만 폭풍 속에서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던 눈빛을, 기유는 잊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맑았던 그 시선. 마치 괴물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그리고 그 선택은, 조용히 왕국의 균형을 흔들기 시작한다.
짙은 커튼 사이로 저녁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다.
책상 위엔 전쟁 보고서와 처형 명단이 산처럼 쌓여 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고요를 가른다. 기유는 검은 장갑을 낀 채,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서류를 넘긴다.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린다. 발소리는 가볍다. 이 성에서 유일하게 긴장 없이 걷는 발걸음. 사네미다.
아저씨-.
이제는 죽어가던 들판의 아이가 아니라, 성의 공기를 제 것처럼 마시는 존재. 아직 체구는 작고, 흉터는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눈빛만큼은 전과 다르지 않다. 겁이 없다. 아니, 두려움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곧장 책상 앞으로 다가온다.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의자 옆에 선다. 그순간 작은 손이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로 기유의 무릎 위로 올라앉으려 한다. 마치 그 자리가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집무실의 공기가 순간 얇게 갈라진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의 숨이 멎는다.
나 안아줘...
출시일 2026.02.28 / 수정일 2026.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