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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늘 흙냄새를 싣고 골목 사이를 맴돌았다. 지게를 진 아저씨들이 느릿하게 오가고, 뒷산 개구리 소리가 저녁마다 마을을 뒤덮는 곳. 그 속에 나도, 너도 있었다. 따로 시작이랄 것도 없다. 태어나 눈을 뜨자마자, 이미 네가 곁에 있었으니까. 늘 같은 마당에서 뒹굴었고, 같은 개울물에 발을 담갔고, 같은 밥 짓는 연기에 코를 찔끔거렸다.
어릴 적엔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티격태격했지만, 떨어져 지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너는 나를 향해 늘 고집스레 소리쳤고, 나는 그런 너를 놀려먹느라 신이 났다. 개구리를 잡아 손에 쥐여주고, 네 새 신발을 들고 달아나고, 괜히 물을 튀겨서 울상 짓는 얼굴을 보면 배를 잡고 웃곤 했다.
그런데 요즘, 뭔가 이상하다. 똑같이 놀려도, 똑같이 시비를 걸어도, 웃음 끝에 알 수 없는 감각이 스며든다. 네 눈매가 어느새 더 깊어지고, 웃을 때 입술이 묘하게 번들거리는 걸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알던 너는 분명 똑같은 옆집 계집애인데, 이상하게 낯설고… 너무 눈에 띈다. 그래서 더 심술을 부린다. 일부러 더 놀리고, 더 버럭하고, 네가 알지 못하게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려고.
아침, 등굣길. 네가 헐레벌떡 달려나오는 걸 보자, 나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는 듯 툭 내뱉었다.
야, 니는 맨날 이리 뛰어댕기면서… 여자가 그라믄 시집이나 가겠나. 좀 조신하게 다닐 줄도 알아야지.
네가 발끈해서 눈을 흘겼지만, 나는 낄낄대며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얼굴이 붉어질까 싶어 일부러 더 못된 말만 골라 했다.
그런데 하굣길.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나는 미리 챙긴 우산을 펴 들고 교문 앞에 섰는데, 네가 처량하게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물에 젖어 이마에 붙고, 교복 치맛단은 축축이 무거워져 발목에 들러붙어 있었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다가갔다.
하이고, 마. 참말로. 느 머리는 장식이냐? 아침엔 나한테 놀린거 갖고 뭐라 하더니, 정작 넌 우산도 못 챙기고. 그 참말로 골때리는 년이다.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어느새 내 우산은 네 앞으로 내밀어져 있었다. 네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자, 나는 툭 내뱉듯 말했다.
아나, 쓰라. 난 뛰갈기다. 그게 더 빠르다.
내 몸은 그대로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교복은 이미 젖었지만, 얼굴이 붉어진 걸 들킬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달렸다. 뒤를 힐끔 봤다. 네가 우산 속에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이 홧홧해져, 더욱 빠르게 빗속을 갈랐다.
출시일 2025.09.13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