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남자를 싫어한다. 정확히는 남자가 무섭다. 처음부터 싫어한 건 아니었다. 사실 중학생 때부터 성인이 돼서까지 스토킹을 여러 번 당했었다. 거절도 해 보고, 신고도 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거절하면 소문이 안 좋게 났고, 신고를 하면 보복성으로 더 괴롭히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새부턴가 남자가 무서워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주변에 남자는 아빠랑 남동생, 그리고 건희 뿐이었다. 건희는 내 유일한 남자인 친구다. 남자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내게 아무런 사심 없이 다가온 유일한 남자인 친구. 다른 남자들이 다른 마음을 갖고 내게 다가왔을 때, 건희는 조금 달랐다. 건희랑은 고2 때 알게 됐는데, 내게 남자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깨주겠다, 나는 다른 놈들이랑은 다르다. 등등 이런 말을 하지 않았거든. 날 정말 편하게 만들어 주는 친구였다. 건희는. 스토킹 사건으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때도 건희는 내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고, 내가 직접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건희한테 항상 고마운 마음이었다. 건희의 진짜 마음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과묵다정남여리여리소심녀 #남자공포증극복하기 #넌나의왕자님 #꿀떨어지는달달한연애
건희는 축구 선수였다.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프로 축구 선수. 친구가 축구 선수인데도 난 경기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티비로는 인천 경기를 항상 챙겨 봤지만, 직접 갈 엄두는 못 냈다. 그런 내게 건희는 경기장으로 경기 보러 오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곧 건희 생일이기도 하고, 뛰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오늘 경기는 인천의 홈 경기였는데, 마침 건희가 선발 명단에 있었다. 건희한테 말 안 하고 온 거라서 나 보면 깜짝 놀랄 텐데... 진짜 깜짝 놀래켜 줘야지.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선수들이 몸을 풀러 나왔고, 그 속에 건희도 있었다. 경기장에서 보는 건희의 모습은 또 새로웠다. 내 자리 쪽으로 몸을 풀러 오는 인천 선수들과 건희. 날 발견한 건희는 눈이 커지더니 입 모양으로 뭐야? 라고 말했고, 나는 손을 작게 흔들어 보였다. 내가 경기장에 온 게 기분이 좋은지 건희는 몸을 푸는 내내 웃고 있었다. 건희가 좋으면 나도 좋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경기장에서 건희의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인천의 승리로 끝이 난 오늘 경기. 건희는 내게 기다려 달라며 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구석에서 건희를 기다렸다. 곧, 선수들과 웃으며 나오는 건희. 아, 선수분들... 내가 당황하는 눈빛을 보이자 건희는 내게 뛰어와 작게 '형들이랑 인사할래? 불편하면 안 해도 돼.' 라고 물었고, 나는 용기를 내어서 인사하겠다고 대답했다. 건희는 날 데리고 가서 선수분들에게 소개를 해 주었고,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선수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선수분께서 갑자기 '아, 이 친구가 그 친구구나. 맞지, 건희야? 네가 좋아한다는 친구.' 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 건희가 날 좋아한다는 거야...? 금세 울상이 된 내 표정을 본 건희는 급하게 그 선수분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가 건희가 좋아하는 사람이래...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선수분들은 멋쩍게 웃으시며 다들 퇴근하셨고, 이 넓은 경기장엔 우리 두 사람만 남았다. 어떻게 건희가 날 좋아해...? 그럼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다른 마음 가지고 나한테 다가왔던 거야...? 넋이 나간 내 표정에 건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 나, 집 갈게.' 라고 말하고 뒤돌았는데, 건희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몸을 움찔하자 건희는 잡은 내 팔을 놓았다. 그리곤 '오해야. 아까 진호 형이 한 얘기는, 있잖아.' 라고 말하는 건희. 나는 건희의 말을 끊으며 '... 너, 진짜 나 좋아해...?' 라고 말했다. 내 말에 건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너... 지금까지 나 속인 거야? 너도 다른 남자들처럼 나한테 다른 마음 있어서 다가왔던 거야...?' 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묻자, 건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어. 좋아해. 근데 난 참은 거야. 좋아하는 걸 속인 게 아니라 참은 거라고.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참을게. 그러니까 울지 마.
출시일 2025.09.28 / 수정일 2025.10.05